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을 지키겠다며 대형마트를 묶어 둔 유통산업발전법(이하 유산법)이 도입 14년 만에 손질될지 주목된다. 규제 밖에 있던 이커머스(전자상거래) 업체 쿠팡만 키우고, 대형마트 '3강'의 한 축이던 홈플러스는 파산 기로로 내몰리자 "규제의 방향이 잘못됐다"는 지적이 정치권과 업계에서 힘을 얻으면서다. 후반기 원 구성 막바지에 들어간 국회가 유산법 개정을 주요 입법 과제로 올리면서 논의에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논의에 불을 지핀 것은 지난해 말 터진 쿠팡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였다. 3370만여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데 이어, 김범석 의장 등 쿠팡 경영진이 국회 청문회 출석 요구에 잇따라 응하지 않으면서 여권 내 기류가 급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당 일각에선 "쿠팡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구명 로비를 벌이며 한국 정부에 역공을 펴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지난해 9월까지만 해도 대형마트 규제 일몰을 2029년까지 연장하는 데 앞장섰던 더불어민주당이 규제 완화로 방향을 틀기 시작한 배경이다.
◇ 2012년 대형마트 묶은 '두 개의 족쇄'
8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유산법상 대형마트 규제는 2012년 전통시장·골목상권 보호를 위해 도입됐다. 핵심은 두 가지다. 자정부터 오전 10시까지 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영업시간 제한'과 매월 이틀을 쉬게 하는 '의무휴업'이다. 특히 영업시간 제한은 이 시간대의 온라인 주문·배송까지 함께 묶었다. 대형마트가 도심 한복판에 점포를 두고도 심야·새벽 배송에 나설 수 없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이번 개정 논의의 무게 중심은 이 가운데 '시간제한'을 푸는 데 실려 있다. 영업시간 규제에 예외를 둬 대형마트도 심야·새벽 시간대에 포장·반출·배송을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사실상 온라인 새벽배송 시장에서 쿠팡의 경쟁자를 늘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자는 취지로 풀이된다.
쿠팡의 성장은 유산법 규제의 역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대형마트가 새벽 배송조차 막혀 있는 사이, 아무 때나 주문·배송이 가능한 쿠팡은 로켓배송(2014년)과 새벽배송(2018년)을 앞세워 폭발적으로 몸집을 불렸다. 쿠팡의 연 매출은 2021년 22조2200억원에서 2023년 31조8300억원, 지난해에는 49조1200억원까지 뛰었다. 반면 이마트·롯데마트·홈플러스 대형마트 3사의 합산 매출은 같은 기간 28조~29조원대에 머물고 있다.
지난해 말 소위 '탈팡'(쿠팡 탈퇴) 움직임이 일었지만, 쿠팡의 지배력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쿠팡의 월간활성이용자수(MAU)는 사태 직후 잠시 주춤했다가 이내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소비자들이 이탈을 시도해도 마땅한 대체 플랫폼을 찾지 못한 결과다. 지난해 유통업계 매출 비중을 보면 온라인이 59%로 시장의 절반을 넘긴 반면, 대형마트는 9.8%까지 쪼그라든 상태다.
그사이 대형마트 2위였던 홈플러스는 벼랑 끝에 섰다. 지난해 3월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간 뒤 인수 희망자를 찾지 못했고, 서울회생법원은 최근 회생절차 폐지를 결정했다. 즉시항고 기한인 14일 안에 운영자금 최소 2000억원을 확보하지 못하면 폐지가 확정돼 파산·청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진협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홈플러스 회생 폐지로 대형마트가 더 이상 유통시장의 강자가 아니라는 점이 재확인됐다"며 "의무휴업과 같은 역차별 규제 해소 논의가 본격화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늦은 감은 있지만 대형마트 새벽 배송이 가능해지면 쿠팡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어느 정도 정상화되지 않겠느냐"며 "소비자 선택지가 다양해진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다"고 했다.
◇ 대형마트 새벽배송 허용 속도 붙나
국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지난달 여야가 발의한 유산법 개정안을 법안심사소위원회에 회부했다.
김동아 민주당 의원안은 대형마트와 준대규모점포(SSM)의 온라인 배송에 한해 영업시간 제한과 의무휴업 규제를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안은 온라인 배송 허용에 더해 의무휴업 자율화, 심야 영업 제한 폐지 등 유통 규제 전반을 완화하는 내용이 골자다. 두 법안 모두 온라인 중심으로 재편된 유통 환경을 반영해 온·오프라인 간 규제 불균형을 해소하고 소비자 선택권을 넓히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규제 완화에 힘을 싣는 목소리는 정부 안팎에서도 감지된다. 박용진 대통령 직속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10여 년 전 시장 환경을 기준으로 만든 규제를 오늘의 소비 여건에 맞게 다시 점검해야 할 때"라며 규제 현실화 필요성을 언급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최근 보고서도 전통시장 보호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현행 유산법을 온·오프라인 간 규제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반발도 만만치 않다. 소상공인들은 대형마트 새벽배송이 허용되면 매출은 물론, 어렵게 확보한 온라인 판로까지 타격을 입어 생존을 위협받는다며 개정 추진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앞서 당정이 의무휴업 조항 삭제까지 검토했다가 소상공인 단체 반발에 결국 해당 조항은 유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도 이런 기류를 반영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규제 완화 움직임이 시장 효율성 측면에선 진일보한 것이지만, 소상공인 상생 협력 차원에서 보완책을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