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의 대다수 기업은 창업자의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에 의존해 움직였다. 이병철 회장이 이끈 삼성과 정주영 회장이 이끈 현대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지금 이들 기업은 총수 혼자 경영을 책임지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총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각 분야를 관리하고 미래를 위한 최종 의사 결정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키맨(keyman)'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요 기업들의 키맨을 소개하고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대형마트 점포만 열면 무조건 수익이 나던 시절이 있었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자산 가치가 올랐을 뿐만 아니라 집객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유통 마진(이익)만 고민하면 되는 시절이었다. 정치권에서 대기업의 대형마트 사업을 '땅 짚고 헤엄치기'라며 비판했던 이유다.

그랬던 대형마트 사업은 이커머스(전자상거래) 쇼핑 시대를 만나 위기를 맞게 됐다. 2023년 이마트(139480)는 상장 이래 처음으로 469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투입된 구원투수가 바로 한채양 이마트 대표이사다. 그는 숫자로 사업을 읽고, 새 방향을 설정하고 숫자로 실적을 보고하는 역할을 신세계그룹에서 20년 넘게 맡아온 인물이다.

그래픽=손민균

◇ "함께 일하면 안다, 깔끔하다… 숫자로 답하는 전략가"

9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1965년생인 한 대표이사는 에쓰오일과 SK텔레콤을 거쳐 2001년 신세계그룹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영지원실 과장 자리였다. 경영지원실은 지금의 경영전략실로 인사와 재무, 계열사 사업 지원을 총괄하는 그룹의 컨트롤타워였다.

그 시절은 신세계그룹에 변화가 많고 실무적으로도 일이 많을 때였다. 신세계그룹은 1997년 공정거래법상 계열분리에 성공하며 삼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됐다.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막내딸인 이명희 회장은 신세계를 유통 대기업으로 키우기 위해 도약을 위한 새로운 판을 그려야 했다.

신세계백화점이 상호를 (주)신세계로 변경한 것도 2001년이다. 이후 10년간 신세계그룹은 적극적인 영토 확장에 나섰다. 신세계건설, 신세계푸드, 조선호텔, 신세계인터내셔날 등 41개 계열사를 가진 그룹으로 성장했다. 2011년엔 (주)신세계와 이마트 법인을 분할하면서 지금의 사업 토대를 갖추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이명희 회장의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이 구학서 전 회장이나 허인철 전 사장(현 오리온 부회장)이다. 이들이 굵직한 사업 방향을 그려서 앞으로 나아갈 때 당시 한 대표이사는 이들을 보좌했다. 실무자로서 합을 맞춘 셈이다.

한 대표이사가 임원직에 처음으로 이름 올린 것은 2009년 신세계 경영지원실 기획관리담당 상무보부터였다. 당시 허인철 사장이 경영전략실장으로 있어서 함께 업무를 했다. 한 대표이사는 이후 신세계그룹 경영전략실 기획관리담당(2011년)과 전략실 관리팀 상무(2013년), 이마트 경영지원본부장 겸 관리담당(2015년), 전략실 관리총괄 부사장(2018년) 등을 역임했다.

"일이 참 많았는데, 답변이 늘 깔끔했다. 숫자로 정확하게 대답해서 함께 일하기 좋았다." 한창 실무를 하던 당시 그에 대한 그룹 관계자의 회상이다.

2023년 이마트 창립 3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채양 대표이사가 기념사를 하고 있다./이마트 제공

◇ 코로나 위기 속 공격적 투자 단행

한 대표이사가 대표로서 첫발을 내디딘 건 2019년이었다. 그는 조선호텔앤리조트 대표로 임명됐다. 호텔업이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났을 때다. 이전까지 서울 시내 5성급 호텔은 사실상 호황을 누렸다. 중국을 필두로 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서울을 찾았기 때문에 전체 객실의 70% 이상은 늘 여행사들의 차지였다. 적극적으로 객실 영업을 하지 않아도 사업이 잘 굴러가던 때였다.

하지만 하늘길이 막히면서 객실이 텅텅 비기 시작했다. 다른 호텔들은 사업 효율화에 나섰다. 호텔을 리츠에 넘기거나 매각해서 재무 손실을 메우는 데 집중했다. 반면 한 대표이사는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갔다. 조선호텔앤리조트는 2020~2021년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기에만 5개의 신규 호텔을 출점했다. 2020년 1월 개장한 그랜드 조선 부산부터 포포인츠 바이 쉐라톤 서울 명동(2020년 10월), 그래비티 서울 판교(2020년 12월), 그랜드 조선 제주(2021년 1월), 조선 팰리스(2021년 5월)가 대표적이다.

호텔업계 관계자는 "조선호텔앤리조트의 행보는 이례적이었다. 언제까지 코로나19가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투자를 회수할 수 있는 시점을 알 수 없던 때였다. 보통 자신감으론 해낼 수 없던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 대표이사는 숫자에 밝은 사람이었다. 호텔 개장 등으로 단기적으로 부채 비율이 늘었지만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정도로만 유지했다. 한쪽으로는 조선호텔 침구나 가정간편식(HMR)을 개발하면서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한 대표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리테일 사업 매출은 2024년 기준 1000억원을 넘어섰다. 롯데·신라호텔 등 다른 대기업 호텔과 비교했을 때 리테일 사업 규모를 이만큼 키운 곳은 조선호텔이 유일하다.

(왼쪽부터) 당시 임영록 신세계프라퍼티 대표이사, 한채양 조선호텔앤리조트 대표이사, 남기덕 한국 메리어트 인터내셔널 대표, 브라이언 백 조선 팰리스 총지배인이 2021년 5월 25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센터필드 웨스트타워에서 열린 '조선 팰리스 서울 강남 그랜드 오프닝 세리머니'에 참석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조선호텔앤리조트 제공

◇ 수익성 강화에 집중해 영업이익 개선

한 대표는 그간 보여준 성과를 바탕으로 2023년 이마트 대표이사로 등판했다. 한 대표는 그해 12월 이마트 창립 30주년 행사에서 "과거 30년의 영광을 뒤로 하고 새로운 30년을 준비해야 한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이마트인의 열정을 살린다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이마트의 신성장동력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받던 시점이었다.

2016년부터 공식적으로 이마트 경영을 책임지게 된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이커머스 시대 이마트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2019년 외부에서 대표이사를 등용했지만 성과가 좋지 않았다. 이베이코리아 인수 등 대규모 자금을 쏟아붓는 공격적인 행보에도 이마트의 온라인 유통 시장 장악은 실패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소위 '정용진의 남자'라고 불리던 당시 이마트 대표이사가 퇴임하고 신세계 그룹에서 실무부터 갈고 닦아온 한 대표가 새로 부임하면서 이번엔 이명희 명예회장이 인사권을 행사했다는 해석이 나왔던 때"라고 했다.

한 대표가 부임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수익성을 개선하는 일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마트(대형마트)와 에브리데이(기업형 슈퍼마켓), 트레이더스(창고형 할인점) 등 다른 업태들의 통합 매입을 시행한 것이다. 단일 매입 규모를 키워 원가를 절감하고 이를 가격에 다시 투자해 집객력을 높이는 전략이다. 마트의 본업 강화이기도 하다.

한 대표는 "과거 대형마트, 창고형 마트, 슈퍼마켓, 온라인 등 업태별 매입에서 통합 매입 체계로 전환해 단일 매입 규모가 1.7배 확대되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겠다"며 "개선된 원가 절감 분을 가격에 다시 투자해 고객 수가 증가하고 매출이 확대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성과가 나왔다. 이마트에 따르면 지난해 별도 기준 영업이익은 2771억원으로 전년 영업이익(1553억원) 대비 2배가량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한 대표가 제시한 방향성은 그룹 내에서도 인정받았다. 한 대표는 이마트 대표이사를 맡은 지 1년 만에 2025년 정기 임원 인사에서 사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사장 승진은 그가 유일했다. 그는 학연과 지연에 얽매이지 않는 스타일로 알려졌다. 서울 마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나왔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허황되고 거창한 말, 현학적인 말은 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분별이 분명하고, 그 일부터 해나가면서 큰 산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