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의 대다수 기업은 창업자의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에 의존해 움직였다. 이병철 회장이 이끈 삼성과 정주영 회장이 이끈 현대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지금 이들 기업은 총수 혼자 경영을 책임지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총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각 분야를 관리하고 미래를 위한 최종 의사 결정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키맨(keyman)'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요 기업들의 키맨을 소개하고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2025년 11월 26일 롯데그룹의 '2026년 정기 인사'가 발표되자 롯데맨들의 관심은 노준형 대표(사장)에게 쏠렸다. 그가 롯데를 이끌 새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롯데 연말 인사에서 그룹을 이끌던 부회장단 6명 전원이 용퇴했다. 또 오랜 기간 유지됐던 사업총괄 체제(BU 체제·HQ 체제)를 폐지했다. 대신 신동빈 회장의 양옆에 전략·기획을 담당할 노준형 대표와 재무·혁신을 담당할 고정욱 대표를 앉혔다. 신 회장과 전문 경영인들이 합을 맞춰 롯데그룹을 나아가게 하겠다는 뜻이 반영된 인사였다.
재계에서는 롯데그룹이 이제서야 신 회장의 뜻대로 회사를 경영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사업부와 지주 간 불필요한 갈등이 사라지는 덕이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예전엔 신 회장에게 직보(직접 보고)하겠다는 계열사 대표와 이를 가로막는 지주 간의 보이지 않는 권력 갈등이 종종 있었다"면서 "롯데의 과거를 속속 아는 인물들이 모두 퇴진했고 인사 면면이 새 얼굴로 바뀌면서 이전과는 다른 롯데의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했다.
◇ 정치색 옅고 실무 능력 입증
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롯데그룹의 전략과 기획을 담당하는 노준형 대표는 1968년생으로 성광고등학교와 계명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MBA를 거쳤다. 롯데그룹에는 2002년 합류했다. 롯데이노베이트(구 롯데정보통신)의 인사팀장·전략기획팀장·전략경영본부장·DT사업본부장 등을 거치고, 2021년 롯데이노베이트 수장으로 부임한 후 메타버스, 전기차 충전, 자율주행 등 신사업과 그룹 IT(정보기술)·DT(디지털 전환)를 주도했다. 롯데지주에는 2023년 경영혁신실장으로 합류했다.
노 대표는 최근 몇 년간 끊임없이 자리를 바꿨다. 2024년 말에 시행된 '2025 정기 인사'에서 사장으로 승진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혁신실과 사업지원실을 통합한 경영혁신실장을 맡았다. 이어 1년 만에 지주 대표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매년 승진한 셈이다.
그의 초고속 승진 행보를 두고 '알만한 사람은 알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몇 년간 롯데그룹의 사장단 회의인 VCM(Value Creation Meeting) 회의에서 노 대표에게 발언권이 유난히 자주 주어졌었기 때문이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신동빈 회장이 노 대표를 지명해 발언하게 해줬던 사례가 몇 번 있다"면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던 롯데의 신(新) 권력"이라고 했다.
노 대표 발탁 배경엔 존재감은 있지만 치우치지 않는 언사가 있다는 평가가 많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노 대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는 여간해선 세파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실무에 관련된 일이 아닌 사내 정치적인 움직임에 말은 얹는 사례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그에게는 'OO 라인'이라는 꼬리표가 없다. 이전에는 발탁 인재의 이름 뒤에는 누구 라인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지금은 롯데그룹을 떠난 OB들의 유산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이는 그간 롯데그룹의 성장이 더뎠던 이유이기도 하다. 전 롯데그룹 관계자는 "노 대표는 굳이 따지자면 신동빈 라인인 셈"이라고 했다.
관성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신 회장의 실험적 인사가 노 대표 임명으로 완성에 다다랐다는 평가도 나온다. 신 회장은 부친인 신격호 전 롯데그룹 회장 시절 롯데를 일궜던 기성세대와의 단절을 통해 롯데그룹이 새로운 도약을 하길 바라왔다. 주로 서울대학교 학연으로 촘촘하게 이어져 있던 롯데그룹에 비(非)서울대 출신 대표를 앉힌다거나, 외부 인사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고 롯데그룹에 뿌리가 깊은 이들을 견제하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롯데그룹의 한 관계자는 "노 대표는 오랜 기간 실무에서 성과를 보여온 인물"이라면서 "정치색이 옅은데 실무 능력도 입증됐으니 신 회장이 마음 편히 기용했을 것"이라고 했다.
◇ 롯데정보통신 상장 및 비주력 사업 매각 주도
노 대표는 2018년 롯데이노베이트(구 롯데정보통신) 상장에도 많이 관여했다. 당시 대표이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노 대표는 롯데정보통신의 전략경영본부장이었다. 노 대표는 롯데정보통신이 나아갈 점에 대해 시장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는 사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롯데그룹이 2017년 10월 지주 체제로 바뀌고 자회사를 대상으로 시행한 첫 상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룹 내에서는 2005년 롯데쇼핑 이후 12년 만에 추진된 기업공개(IPO)였다. 그룹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당시 신동빈 회장은 롯데그룹 경영비리 사건에 휘말려있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기업공개를 위해 누군가는 시장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하는데 전부 '뒤에 숨고 싶다'는 목소리가 클 때였다"고 말했다. 게다가 시장과의 소통을 잘못했다가는 롯데그룹의 일감을 몰아주면서 성장한 롯데정보통신이라는 오명이 재확산할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노 대표는 글로벌 IT 전문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목표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 집중했다. 그룹 내부에서 어떻게 바라볼지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외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이후 롯데지주에서 롯데렌탈 매각, 코리아세븐 ATM 사업부 매각, 롯데케미칼 파키스탄 매각 등 비주력 사업부를 매각하는 의사결정을 주도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그가 업무에서 성과를 낼 줄 아는 실무형 인재라는 평가가 많다"며 "평상시에 '업의 본질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말도 자주 하는 편"이라고 했다. 이는 신동빈 회장의 올해 VCM 핵심 메시지이기도 하다.
◇ 유동성 확보 및 그룹 체질 개선 숙제
앞으로 노 대표가 풀어야 할 숙제는 적지 않다. 당장 롯데렌탈 매각에 제동이 걸렸다. 홈플러스로 대표되는 사모펀드의 경영 실패 사례가 대두된 상황에서 공정거래위원회는 사모펀드로 소유권이 넘어가는 것을 엄격하게 판단했다. 롯데그룹은 재매각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다.
유동성 확보와 그룹 체질 개선 문제도 있다. 롯데그룹은 2024년 이후 유동성 위기의 주체로 끊임없이 이름을 올려왔다. 이는 그룹 캐시카우 역할을 해야 하는 롯데케미칼과 롯데쇼핑이 모두 시원찮은 성적을 내고 있는 탓이다. 롯데케미칼은 석화 구조조정이 완료돼야 빛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 사이에 중요한 의사 결정을 여러 번 내려야 하는 상황이다. 롯데쇼핑도 이커머스(전자 상거래) 약진에 대한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모두 노 대표가 관여해야 한다.
전 롯데그룹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신임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노 대표가 부담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 신동빈 회장이 그룹 내 변화를 꾀하면서 오랜 기간 신임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다. 이 관계자는 "신 회장이 인재를 기용하고 기회를 주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졌다"며 "현재는 노 대표가 그룹 내에서 가장 앞서있는 인물이지만,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합을 잘 맞춰야 한다"고 했다.
현재 노 대표와 합이 잘 맞는 인사로 정호석 호텔롯데 대표이사와 김동하 롯데면세점 대표이사 등이 거론되고 있다. 정 대표이사는 롯데지주 사업지원실장을 맡았었고, 김 대표이사는 롯데지주 기업문화팀장을 맡았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