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유통업계의 화두 중 하나는 '정산 주기'입니다. 정부가 유통업체의 납품대금 정산 주기를 절반 가까이 줄이는 법안을 추진하면서 플랫폼과 납품업체 간 돈의 흐름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졌습니다. 티몬·위메프(이하 티메프) 대규모 미정산 사태에서 드러난 정산금 유용 문제를 막겠다는 취지지만, 플랫폼·이커머스 업계는 물론 대형마트 등까지 정산 구조를 어디까지 손볼지 계산이 복잡해진 분위기입니다.
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규모유통업에서의 거래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이하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을 올해 초 발의할 계획입니다. 다만 개정안이 통과되더라도 즉시 시행 대신 업계가 적응할 수 있도록 최대 1년의 유예기간을 두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 정산주기 단축 시 쿠팡, 홈플러스, 다이소 등 영향 불가피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의 핵심은 정산 기한 단축입니다. 납품업자로부터 상품을 직접 매입해 유통업체가 판매하는 '직매입 거래'의 법정 정산 기한은 60일에서 30일로 줄어듭니다. 유통사가 상품을 외상 매입해서 판매한 후 대금을 지급하고 미판매된 경우엔 반품하는 '특약매입' 또는 위수탁 거래 또한 40일에서 20일로 단축됩니다.
정산 구조 개편 논의는 2024년 티메프 사태 이후 본격화됐습니다. 상품은 팔렸는데 제때 대금이 지급되지 못해 납품업체와 입점 셀러(판매업자)의 피해가 연쇄적으로 발생한 데다, 일부 정산금이 운영자금으로 유용됐다는 지적까지 나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최근 국내 대형 플랫폼인 쿠팡을 둘러싼 책임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플랫폼에 문제가 생길 경우 거래·결제·정산 구조가 한꺼번에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커졌습니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적용 대상은 대형마트·이커머스·편의점 본사 등 대규모유통업자입니다. 공정위가 대규모유통업법상 대규모 유통업체 132개사를 전수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일부 대형 유통사의 정산 주기는 법정 상한선에 가깝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쿠팡(52.3일)입니다. 이 외에도 ▲홈플러스익스프레스 40.9일 ▲홈플러스 46.2일 ▲전자랜드 52일 ▲메가마트 엠춘천점 54.5일 ▲마켓컬리 54.6일 ▲다이소 59.1일 ▲영풍문고 65.1일로 조사됐습니다. 전체 평균 대금 지급 기간 직매입 27.8일, 특약매입 23.2일과 비교하면 차이가 큰 편입니다. 이때 개정안이 시행되면 이들 업체는 정산 시스템과 자금 운용 전반을 재설계해야 합니다.
◇ 개정안 취지엔 공감하지만, 대응법은 '심사숙고'
업계는 개정안을 예의주시하는 분위기입니다. 각자의 사업 구조와 자금 상황이 달라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커머스 업계 관계자는 "법이 허용한 '최대치'만 반영한 관행을 정상화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법적 취지는 공감한다"면서도 "물류·정보기술(IT)·정산이 모두 연결된 구조라 법안 윤곽이 명확해져야 현실적인 로드맵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플랫폼 업계 관계자는 "확정된 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선제 대응했다가 추후 기준이 바뀌면 비용만 늘어난다"며 "중소 플랫폼은 대형 플랫폼과 달리 비상 자금이나 여윳자금이 거의 없어 정산 기한을 일괄적으로 줄이면 흔들릴 수 있다. 규모별 차등 적용이나 정책 금융 지원 등 안전판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납품업체·입점 판매자들도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한 식품 납품업체 관계자는 "정산이 빨라지면 재고·원자재·인건비 운용이 한결 수월해지겠지만 실제 어떤 거래부터 어떻게 적용될지는 법 시행 후에야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업계는 개정안의 취지엔 공감하면서도 정책적 설계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정산을 앞당기는 방향 자체는 맞지만, 거래 유형과 기업 규모, 자금 구조가 제각각인 만큼 이를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시장에 미칠 파급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종우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개정안의 방향성은 바람직하지만, 유통 구조와 플랫폼 형태가 다양해진 만큼 '누구에게 어떻게 적용할지' 등 정책을 정교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며 "계속해서 변하는 유통 시장의 환경을 반영하고 거래 구조별로 파악해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정책을 설계하는 게 중요한 때"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