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유통 침체와 사모펀드식 경영의 한계가 겹치며 홈플러스 사태가 장기화하고 있다. 인수 후보 부재와 경영 악화 속 점포·협력사·노동자들의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정치권과 이해관계자들은 책임을 미루고 있다. 홈플러스가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해결을 가로막는 구조적 문제는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선택이 필요한지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지난 17일 오전 노란 조끼를 입은 민주노총 마트산업노조 홈플러스지부 소속 노동자들은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절을 시작했다. 홈플러스 기업 회생 돌입 258일째를 맞아 정부 개입을 촉구하는 258배를 올린 것이다. 안수용 홈플러스지부 노조위원장, 손상희 수석부지부장, 최철한 사무국장 등 노조 측 지도부 3인은 이달 8일부터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한 상태다.
안 위원장은 "정부는 30만명의 서명과 목숨을 걸고 농성 중인 노조원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 지역 상권과 10만명 이상의 생계가 달린 문제를 외면하지 말아달라"면서 홈플러스 인수 성사를 위해 정부가 해결 방안을 마련하고, 농협이 홈플러스를 인수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정치권이 불붙인 농협 역할론
2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농협 역할론은 올해 국정감사에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처음 제기됐다. 지난달 24일 열린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어기구 위원장(더불어민주당)은 강호동 농협중앙회장에게 '공익적 관점'을 들어 홈플러스 인수를 검토하라고 했다.
당시 어 위원장은 "농협에서 홈플러스 인수를 검토한 적이 있느냐"고 물으며 "소상공인과 협력 업체를 합치면 30만명이 길바닥에 나앉을 판이다. 농협이 인수하는 것이 좋지 않을지 공익적 관점에서 검토해 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강 회장은 "홈플러스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며 "농협유통과 하나로유통도 연간 400억원씩 적자가 나고, 직원 200명 이상을 구조조정 했다"고 답했다.
실제로 농협유통과 하나로유통의 2022년 이후 누적 당기순손실은 800억원 이상이다. 올해 국정감사를 앞두고 농협 측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농협유통은 2022년 183억원, 2023년 288억원, 2024년 352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올해 8월 기준 손실액도 151억원이었다. 하나로유통도 2022년부터 올해 8월까지 누적 13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냈다.
강 회장은 "홈플러스의 어려움을 잘 알지만, 농협의 어려움도 있다"며 "우리가 짊어질 짐도 버거워서 못 지는데 남의 짐을 지라고 하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 농협 인수 후 시너지 불투명
유통업계에는 농협의 홈플러스 인수가 시너지보다 부작용이 클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저조한 실적은 농협의 특수한 유통 구조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협은 기존 대형마트들과 상품 조달 과정부터 다르다. 농협경제지주가 구매권을 독점하고, 하나로마트는 그 제품들의 판매만 맡는다. 반면 다른 대형마트 소속 상품 기획자(MD)들은 농산물 구매 과정에서 자체 기준보다 품질이 낮으면 적극적으로 가격을 협상하는 등 수익성 극대화를 위해 노력한다.
이런 구조를 쉽게 바꾸기도 어렵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농협경제지주, 농협유통, 하나로유통으로 합쳐지고 쪼개지는 과정에서 '어디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어 있고, 각 법인의 채용 과정에서 선발된 인원들의 인사·급여·보상 체계가 다른 상황에서 구조적 변화를 이끌긴 어렵다. 반발이 거세다"고 했다.
또 하나로마트는 설립 취지상 '농가 보호와 물가 안정'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우선시한다. 소비자의 권익 상향보다는 조합원들에게 비교적 유리한 조건에 농산물을 매입해 주는 것이 우선이다.
대형마트 관계자는 "농협을 같은 유통사라고 보긴 어렵다. 운영 방식과 DNA가 현저하게 다르다. 구조적 문제로 손실만 나는 농협이 수익을 못 내는 오프라인 판매 채널(홈플러스)을 더 가지는 것이 실질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물건을 사서 진열하는 것만으로 유통업을 한다고 할 수 없다"며 "홈플러스와 농협이 만나면 지점은 어마어마하게 많고, 농산물로 대표되는 신선물은 매대에 쌓여 있는데 사 가는 사람은 없는 텅 빈 매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하나로유통이나 농협유통의 점포 둘 중 하나는 지금도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올해 국정감사를 앞두고 농협 측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하나로유통의 적자 점포 비율은 2021년 33.3%에서 2022년 32.1%, 2023년 52%, 2024년 60%, 2025년 8월 기준 62.5%까지 급등했다. 농협유통 또한 2021년 41.7%, 2022년 50%, 2023년·2024년 각각 48.6%, 2025년 8월 기준 47.4%로 집계됐다.
◇ 홈플러스 노조 대 농협 노조 갈등 양상도
농협이 홈플러스를 인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지는 만큼 농협 쪽 반응도 격해지고 있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NH농협지부(한노총 소속)는 농협중앙회의 홈플러스 인수설과 관련해 이달 6일 보도자료를 냈다. 농협지부는 "실체 없는 농협의 홈플러스 인수설로 직원 불안을 키우는 일부 매체는 농협 흔들기를 중단하라"면서 "농협이 3조원 규모의 홈플러스를 인수하면 농협그룹이 파멸할 수도 있을 정도의 상황"이라고 했다. 노조는 이어 "홈플러스 인수로 인한 규모의 경제, 시너지는 기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노조에선 온라인 쇼핑이 확대돼 오프라인 유통 매장은 축소, 소형화 등으로 활로를 찾는 상황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노조 측은 "대규모 인수 합병보다는 농협 유통 사업 경영 개선이 더 시급하다"면서 "정치권에 약한 농협 경영진의 태도를 기회 삼아 홈플러스 인수를 요구하는 것은 농업 및 국민 경제에 크게 이바지해 온 농협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길"이라고 했다.
농협 노조가 홈플러스 노조(민노총 소속)의 농협 등판 요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유는 농협 내부적으로도 구조조정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농협중앙회는 지난 5월 전체 예산 중 20%를 절감하는 범농협 차원의 고강도 자구책을 시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중 농협유통은 2029년까지 흑자 전환을 위해 인력 구조 개선에 나설 계획이다. 인력 구조 개선 방안 중 하나는 정규직 비율은 낮추고 비정규직을 확대하겠다는 내용이다.
◇ "농협이 인수해도 경쟁력 없어"
홈플러스 10만명 노동자의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200만명 농협 조합원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만성 적자 상황이 이어지면서 농협 자회사 중 일부는 농가에서 구매하기로 한 약정 물량 일부에 대한 수매를 중단하고, 농민에게 판매하는 사룟값 등에 대한 비용을 인상하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농협의 한 관계자는 "홈플러스를 살리려다가 농가에 불을 지를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양석준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오프라인 유통업이 전반적으로 침체해 홈플러스의 자생력에 물음표가 붙는 상황이다. 농협에 인수된다고 해도 별다른 경쟁력을 가지긴 어려울 것"이라며 "결국 시장논리에 따라 경쟁력이 없는 홈플러스는 정리되는 수순으로 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