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패션이 일본 등 해외에서 인기를 얻으며 새로운 성장기에 들어섰다. 현대백화점(069960)그룹은 국내 신진 브랜드를 해외에 소개하는 플랫폼 '더현대 글로벌'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유통사 간 협업을 통한 글로벌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단순히 현대백화점이 입점 패션 브랜드를 모집하는 수준을 넘어 여러 브랜드를 모아 일본 유통사와 협상한다. '유통 대 유통' 협업 구조로 시장에 접근한 것이다.
더현대 글로벌은 지난 2021년 문을 연 서울 여의도 '더현대 서울'의 실험 정신에서 출발했다. 당시 지하 2층 '크리에이티브 그라운드'에는 쿠어, 디스이즈네버댓 등 기존 백화점에서는 보기 어려운 신진 한국 브랜드들이 입점해 이목을 끌었다.
지난달 31일 서울 대치동 현대백화점 본사에서 조선비즈와 만난 박동용 더현대 글로벌 팀장은 "2021년 '더현대 서울 지하 2층을 아예 모르는 브랜드로 채워라'라는 대표의 오더(주문)가 있었다"며 "백화점 경력이 40년인 분에게 모르는 브랜드가 어디 있겠나. 그건 '기존 문법을 깨라'는 주문이었다"고 했다. 박 팀장은 "소비자들은 오히려 그런 브랜드들의 진정성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실험'은 결과적으로 '유통이 브랜드를 발굴·육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한 것으로 평가됐다. 더현대 서울은 MZ세대(밀레니얼+Z세대, 1980~2004년생) 소비자와 해외 관광객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성장한 브랜드들이 해외 진출을 모색하면서 자연스럽게 '케이(K)패션 플랫폼'으로 발전했다. 현대백화점은 올해 8월 일본 도쿄 시부야 파르코 백화점에 첫 정규 매장 '더현대 글로벌 도쿄점'을 열었다.
박 팀장은 "더현대 글로벌은 국내 브랜드를 모아 통관·물류·인테리어·마케팅 등을 총괄하는 협업 플랫폼"이라며 "브랜드 하나가 일본 유통사와 협상할 때는 협상력이 약하지만, 현대백화점이 여러 브랜드를 모아 협상하면 훨씬 유리한 조건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백화점은 연내 일본에 추가 매장을 설립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중화권과 유럽으로의 확장도 계획하고 있다. 일본 패션 플랫폼 '누구(NUGU)'를 운영하는 국내 스타트업 메디쿼터스에 300억원을 투자해 실행력도 확보했다. 이를 통해 현지 유통·마케팅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국내 브랜드가 생산과 제품력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박 팀장은 "현재 한국의 '3마'(마뗑킴, 마리떼프랑소와저버, 마르디 메크르디) 같은 브랜드들은 일본의 꼼데가르송이나 이세이미야케처럼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는 초창기 단계"라고 진단했다. 그는 "과거 일본 버블 시기에 현지 백화점들이 자국 브랜드와 함께 해외로 나가며 브랜드 가치를 보호하고 '윈윈'했다. 지금이 한국 브랜드와 유통이 함께 나가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더현대 글로벌의 사업 구조와 목표는.
"하나의 브랜드가 해외에서 장사하려면 라이선스, 홀세일러 계약, 통관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더현대 글로벌을 통하면 이런 장벽이 해결된다. 브랜드 입장에서는 국내에서 물건만 넘기면 일본 유망 백화점에 매장을 바로 오픈할 수 있다. 초기 목표는 현대라는 플랫폼이 해외로 나가는 브랜드들을 지원하고 인큐베이팅(육성)하는 것이다. 케이(K)브랜드의 실력이 일본에서 제대로 발휘되도록 지원하는 게 핵심이다. 장기 목표는 오프라인 유통의 강자로서 플랫폼 역할을 하며 수익 사업화하는 것이다. 현재는 브랜드들에 '좋은 경험'을 제공하는 단계다."
―일본 시장을 첫 거점으로 택한 이유는.
"일본은 패션 시장 규모가 100조원에 이르고, 온라인 침투율이 낮다. 한국은 패션 시장 규모가 이보다 적은데 그중 절반 이상은 온라인이다. 온라인 비중이 너무 크다 보니 브랜드 수명 주기가 짧다. 길어야 5년이다. 일본은 반대다. 온라인 침투율이 낮아 브랜드가 장기적으로 성장할 여지가 크다. 일본에서 한국 브랜드의 '롱런 무대'를 만들 수 있다고 봤다."
―브랜드 선정과 큐레이션 원칙은 무엇인가.
"더현대 서울에서 수집한 판매·재방문·해외 반응 데이터를 모두 가지고 있다. 더현대 서울은 한국의 트렌디한 브랜드 정보를 집약하고 있다. 해외 인기, 매출, 고객 반응 등 데이터가 시스템화돼 있어 해외 전개 가능성이 있는 브랜드를 선별할 수 있다. ORR, 스탠드오일, 인사일런스 등의 브랜드는 세 번 이상 더현대 글로벌 팝업에 참여했다. 브랜드가 자발적으로 다시 참여한다는 건 만족도가 높다는 의미다. 우리가 지향하는 건 단기 매출보다 브랜드와 유통이 함께 성장하는 구조다."
―현대백화점 전체 전략 속에서 더현대 글로벌의 위치는.
"더현대 글로벌은 현대백화점이 '브랜드 빌더'로 진화하는 첫 번째 모델이다. 과거 백화점이 사실상 임대업자 역할이었다면 이제는 브랜드의 글로벌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더현대 서울이 국내 브랜드의 성장 무대였다면, 더현대 글로벌은 해외 무대로 나가는 것이다. 브랜드가 일본에서 자리 잡으면 현대백화점의 바잉 파워(구매력)도 커진다. 결국 유통사와 브랜드가 함께 윈윈하는 구조다. 유통이 제공하는 해외 진출 가능성은 유통 입장에서도 바잉 파워로 작용한다."
―국가별 전략 차이는 어떻게 되나.
"일본은 보수적이고 경쟁이 치열해 속도보다 신중함이 중요하다.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오래간다. 중화권은 경쟁자 수보다 시장 규모가 훨씬 커서 우량 파트너를 선별하는 게 핵심이다. 유럽은 테스트 단계로, 하나의 거점을 중심으로 다른 거점으로 확산하는 모델을 검토하고 있다."
―메디쿼터스 투자 배경은.
"현지 법인을 직접 세우면 속도와 효율이 떨어진다. 사업은 적시성이 중요한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경쟁력 있는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본에서 패션 플랫폼 누구를 운영하는 국내 스타트업 메디쿼터스에 300억원을 투자해 실행력을 확보했다. 현대가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스타트업이 다시 수많은 한국 브랜드를 지원하는 선순환 구조다."
―향후 5년 로드맵은.
"매년 일본 주요 도시에 한두 곳씩 정규 매장을 열 계획이다. 오사카·나고야 등 주요 상권을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확장할 예정이다. 이후에는 대만·홍콩 등 중화권으로, 장기적으로는 유럽까지 확장하려 한다. 더현대 글로벌은 단순 수출 창구가 아니다. 한국 브랜드가 해외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유통의 실험실' 역할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