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롯데백화점이 개최한 '서울의 심판' 프로젝트는 일본의 유명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 작가 아기 타다시 남매 등이 참석해 MZ세대(1980~2000년대 출생)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다. 서울의 심판은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었던 블라인드 시음회 '파리의 심판'에 대한 오마주였다. 국내 백화점이 자체적으로 대형 블라인드 테이스팅 대회를 개최한 것은 서울의 심판이 처음이다.

서울의 심판은 고가 와인이 아닌 10만원 이하 '가성비' 미수입 와인을 출품받아 심사단이 오로지 맛으로만 1위를 뽑았다. 우승작들은 병당 가격이 4만~5만원 선이라 부담 없는 선물로 인기를 끌어 작년 말 롯데백화점의 와인 매출이 증가했다. 수입사 입장에서도 미수입 와인이란 새 시장을 개척한 것이라 '윈윈(win-win)'이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왼쪽부터) 롯데백화점 와인앤리커팀 최준선 치프바이어, 양현모 팀장, 최준호 바이어./최효정 기자

 "고객에게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경험'이 되어야 한다."

최근 국내 와인 시장은 침체기를 겪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던 와인 시장은, 엔데믹(풍토병화) 전환 후 경기 둔화 여파로 수입 물량과 금액 모두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2024년 11월 기준, 와인 수입 물량은 호황기였던 2021년 동기 대비 약 28% 감소했다.

시장 상황이 좋지 않지만 롯데백화점 와인앤리커(wine and liquor)팀은 '수요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확신 아래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서울의 심판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한 양현모 팀장이 있다. 여기에 소믈리에 출신의 최준선 치프바이어, 최준호 바이어가 합류하며 팀의 전문성과 기획력을 강화했다.

양 팀장은 현재 시장 상황을 단순한 위기가 아닌 '재편의 기회'로 보고, 소비자 유입을 넓히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가성비 와인'과 '프리미엄 와인'을 양축으로 하는 투트랙 전략이 중심이다. 백화점 F&B(식음료) 트렌드를 이끄는 그는 과거 노티드와 쌤쌤쌤 등 인기 맛집 브랜드를 롯데백화점에 입점시켰다.

양 팀장은 "시장이 어려울수록 고객은 '더 선별된 경험'을 원한다. 그 선택지들을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의도대로 신의 물방울 작가가 뽑은 가성비 와인이란 콘셉트는 와인에 관심이 있는 젊은층을 자극, 매출 증가로 이어졌다. 서울의 심판 우승작들로 출시한 '더블라인드 와인'은 지난달 말 누적 판매량 1만병을 달성했다.

롯데백화점 모델이 서울의 심판 우승 와인을 들고 있다./롯데백화점 제공

더블라인드 와인의 흥행에 따라 롯데백화점의 지난해 12월 한 달 와인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0%가량 증가했다. 2024년 전체 와인 매출 증가율을 5%포인트가량 앞지른 수치다. 더블라인드 프로젝트의 영(젊은) 고객 구매 비중은 49%로 일반보다 20% 이상 높다.

MZ 소비자를 위한 체험형 와인 경험 제공도 강화했다. 롯데백화점은 와인 멤버십 '컴바인' 회원을 대상으로 '쏨포유' 와인 모임을 개최하고 있다. 롯데백화점 소속 소믈리에 4명과 회원 24명이 참여해 블라인드 시음회를 체험하는 방식이다. 두 달 주기로 열리는데, 컴바인 회원 수는 작년 4월 6000명에서 1년 만에 2만2000명까지 늘었다. 양 팀장은 "이들은 장기적으로 VIP 고객이 될 수 있는 잠재층이기 때문에, 대중성과 스토리를 함께 담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충성고객이자 취향이 더 고급화되고 있는 VIP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프리미엄 큐레이션도 강화했다. 세계적인 희소 위스키 '프리마 앤 울티마'는 VIP 대상 단독 판매로 완판시켰고, 아시아 최초로 다니엘 아샴과 컬래버레이션한 샴페인도 국내에 단 한 병만 들여와 판매시켰다. 김환기 화백 작품과 협업으로 선보인 '돈멜초' 아트 와인은 6개월 만에 3000병이 완판됐다.

이러한 큐레이션의 바탕엔 와인앤리커팀의 전문성이 작용한다. 롯데는 유통사 최초로 팀제를 도입하고 전문 소믈리에를 영입했다. 현재 최준선 치프바이어를 포함한 아시아 챔피언 소믈리에 3명 중 2명이 롯데백화점에 소속돼 있다. 바이어로 소믈리에를 영입한 것도 업계 최초다. 현재 소믈리에 총 4인이 현장과 본부에서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 최 치프바이어는 "현장 경험과 고객 피드백이 기획에 즉시 반영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롯데백화점 와인앤리커팀은 올해 역시 프리미엄과 가성비란 투트랙 전략을 지속해 나갈 예정이다. 고가 와인은 독점성과 문화 콘텐츠의 결합을 통해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하고, 더블라인드 시리즈는 블라인드 테이스팅 대회를 기반으로 확장될 계획이다. 더불어 데킬라, 사케, RTD 등 새로운 주류 트렌드도 반영해, 소비자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킬 신제품 발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양 팀장은 "단지 와인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취향과 삶의 순간을 함께 설계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경험 중심의 주류 콘텐츠를 통해, 백화점 유통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