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란이 기업회생절차에 돌입하며 명품 플랫폼 업계 전체로 위기감이 확산하는 가운데, 대기업 계열 명품 플랫폼들이 안정적인 자본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일부 기업은 높은 정산 신용도를 앞세워 발 빠르게 셀러(판매자) 흡수에 나서고 있다.
15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발란은 지난달 31일 수백억원대의 판매 대금을 정산하지 못해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계획했던 투자 유치가 제때 이뤄지지 못하며 자금 확보에 난항을 겪은 탓이다. 앞서 발란은 일부 입점사에 대해 판매 대금을 예정대로 정산하지 못하고, 결제 서비스가 중단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발란과 함께 소위 '머·트·발'로 묶여 온 1세대 명품 플랫폼 머스트잇과 트렌비에 대한 위기론도 함께 확산 중이다. 이들 업체는 발란과 마찬가지로 외부 투자 유치를 기반으로 성장해 왔다. 특히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MZ세대(1980~2000년대생)를 중심 온라인 명품 소비가 늘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급격히 얼어붙은 경기로 명품 소비가 줄어들며 실적에 타격을 입었다. 머스트잇은 지난해 매출 119억원, 영업손실 73억원을 기록했다. 2023년과 비교하면 매출은 52.2% 줄었고, 적자는 약 3600만원 늘었다.
트렌비는 아직 지난해 실적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적자를 냈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회사는 지난 2023년에 32억원 적자를 기록한 바 있다. 머스트잇과 트렌비는 발란 사태 이후 황급히 정산 주기를 앞당기며 셀러(판매자) 유출을 막고 있다.
이처럼 명품 플랫폼 전체로 위기감이 확산하는 와중에도 대기업 계열 플랫폼들은 명품 거래 사업을 확장하는 모양새다. 탄탄한 자본 구조를 갖춰 외부 투자를 유치할 필요가 없고, 높은 브랜드 인지도를 바탕으로 판매자·구매자 모두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백화점 기반의 유통망을 갖춘 대기업 계열 명품 플랫폼들은 소위 '가품 논란'과 같은 플랫폼 신뢰도 문제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실제 발란은 지난 2022년 100만원이 넘는 고가의 나이키 운동화와 30만원 상당의 후드집업 제품이 가품으로 판명된 이력이 있다. 업계 관계자는 "티메프(티몬·위메프) 사태에 이어 발란 사태를 겪으면서 입점 판매자들이 플랫폼 자체의 신용도를 중시하는 경향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롯데쇼핑 계열 이커머스 롯데온은 2022년 9월 명품 전문관 '온앤더럭셔리'를 선보인 뒤 지난해까지 연평균 20%대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회사는 지난해 11월 15만여개 해외 명품을 패션 매거진 형태로 선보이는 '럭셔리 쇼룸' 코너를 신설하며 해외 직배송 기능도 추가했다. 롯데온 측은 "유통 과정을 축소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품을 제공할 수 있고, 기존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희소성 높은 품목도 선보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밝혔다.
신세계그룹 계열 이커머스 SSG닷컴도 2022년 출범한 명품 전문관 'SSG럭셔리'를 버티컬(특정 상품이나 서비스를 전문으로 하는) 플랫폼으로 지난해 전면 개편했다. 명품과 관련한 SSG닷컴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를 '앱인앱'(앱 안에서 사용되는 다른 앱)에 모아 접근성을 높였다. 회사는 SSG럭셔리를 올해 주력 사업으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기업회생에 돌입한 발란의 셀러를 적극적으로 흡수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명품 버티컬 플랫폼 우아럭스(OOAh luxe)를 운영 중인 11번가는 발란의 정산 지연으로 어려움을 겪는 판매자를 대상으로 안심정산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최근 밝혔다. 배송완료 다음날 정산금액의 70%를 먼저 지급하고, 나머지 30%는 고객이 구매를 확정한 다음날 지급해 기존 대비 7일가량 정산일이 빨라진다는 설명이다. 11번가는 우아럭스에 신규 입점을 희망하는 셀러에게도 안심정산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11번가는 발란 정산 지연으로 피해를 본 자사 플랫폼 내 셀러를 대상으로 고객 주목도가 높은 판매 코너에 상품을 노출하고, 11번가 신한카드 할인 등도 추가로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11번가 관계자는 "각종 혜택을 통해 충성도가 높은 판매자들을 흡수하고, 이들과 계속 상생하는 것이 목표"라며 "적극적인 셀러 영입 활동을 통해 최근 우아럭스 입점 상품 수는 올해 1월 대비 115% 증가하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고 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외부 투자에 기반한 플랫폼 기업은 충분한 매출이 뒷받침돼야 지속될 수 있는데, 경기 불황으로 명품 소비 심리가 악화하며 발란처럼 재무 구조가 취약한 기업들부터 타격을 받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어 "명품 시장 내 구조가 재편되면서 생존에 유리한 대기업 계열 플랫폼들이 반사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