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소매시장 규모는 약 514조원으로 전년 대비 1% 내외 성장에 그친 것으로 추산된다. 올해도 탄핵 정국과 미국 트럼프 정부 2기 출범, 초고령사회 진입, 이상기후, 최저임금 인상 등 복합 위기로 인한 저성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올해 소매시장 성장률 전망치를 0.4%로 예상하기도 했다. 조선비즈는 새해를 맞아 저성장 시대에 맞는 유통은 무엇이고, 우리 유통업계는 어떤 기회를 잡아야 할지 진단해 본다. [편집자주]
서울 스타필드 코엑스점의 별마당도서관은 늘 관광객과 쇼핑객으로 북적인다. 2018년 이 쇼핑몰이 푸드코트를 밀어내고 팔지도 않는 책 5만 권을 진열했을 때만 해도 파격적인 시도로 평가됐다. 그러나 수년이 흐른 현재 쇼핑몰에 체험과 휴식 공간을 만드는 건 당연한 전략이 됐다.
스타필드가 별마당도서관을 만들며 벤치마킹한 모델은 일본의 츠타야 서점으로 알려졌다. 츠타야는 1980년대 CD와 DVD 대여점으로 시작한 서점이다. 독서 인구가 줄고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성장으로 대여 시장이 축소하자 서점과 카페, 식당, 식료품점 등을 결합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물건이 아닌 라이프스타일을 판다’는 개념을 바다 건너 한국 유통 업계에까지 전파한 츠타야가 최근 새로운 포맷(형식)의 매장을 선보여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해 4월 재개장한 ‘시부야 츠타야’는 그나마 남아있던 서점 기능을 완전히 버리고, 지식재산(IP) 콘텐츠의 성지로 탈바꿈했다.
◇라이프스타일 팔던 츠타야, IP 문화 파는 상점으로 진화
지난달 19일 찾은 시부야 츠타야는 지하 2층부터 7층까지 다양한 체험형 공간이 조성돼 있었다. 지하 1층과 1층에는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체험하는 팝업스토어(임시 매장)와 전시 공간이 마련됐다. 5층엔 트레이드 카드 게임을 할 수 있는 ‘포켓몬 카드 라운지’가 들어섰다. 이용료는 시간당 1650엔(약 1만5000원)이다.
팝 아티스트를 주제로 한 공간도 있었다. 지하 2층에는 아이돌 콘텐츠 등을 갖춘 엔터테인먼트 공간이, 1층엔 케이(K)팝 아이돌 스트레이키즈의 팝업스토어가 열렸다. 7층 콜라보레이션 카페에선 브루노마스와 신곡 ‘아파트’를 발매한 블랙핑크 로제의 협업 카페가 한시적으로 운영 중이었다.
3·4층엔 쉐어 라운지(공유 오피스)가 들어섰다.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가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부터, 책장 속에 숨은 개인 공간, 디자인 서적이 진열된 넓은 테이블과 회의실 등이 마련됐다. 시간당 1650엔을 내면 좌석과 음료, 스낵을 이용할 수 있다. 마니아(덕후)를 위한 공간에 웬 공유 오피스인가 의아했지만, 곳곳에 놓인 피규어를 보자 납득이 갔다. 일하는 덕후에겐 이곳이 최고의 일터처럼 보였다.
6층에는 만화책과 피규어, 굿즈(기념품) 등을 파는 IP 서점이 있다. 여기서 파는 상품의 80%는 다른 곳에서 팔지 않는 한정판이라고 한다. 츠타야 운영사 컬처컨비니언스클럽(CCC)이 IP를 가진 기업과 상품을 공동 개발했다.
츠타야가 이런 변화를 준 이유는 ‘라이프스타일 제안’이라는 포맷이 어디서나 먹히지는 않아서다. 고급 주택가인 다이칸야마에선 통하지만, 전 세계 여행객과 쇼핑객, 직장인으로 발 디딜 틈 없는 시부야 도심 한복판에서 고객을 붙잡아 두기 위해선 더 강한 것이 필요했다. 국적과 나이, 세대를 넘어 많은 사람이 몰입할 수 있는 콘텐츠가 그것이다.
츠타야는 도서 판매 감소로 실적이 줄어드는 추세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2010년대 중반 1000개에 달했던 츠타야 점포 수는 현재 800여개로 줄었다. 2023년 3월 기준 CCC의 연 매출은 1086억엔(약 1조150억원)으로 2019년의 3분의 1 이하로 감소했다.
CCC 측은 새로운 문화 시설인 시부야 츠타야의 일일 방문객 수가 기존 2만명에서 3만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전체 매출 중 40%는 이벤트 사업에서, 30%는 공유 오피스에서 발생할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이런 콘셉트의 점포를 다른 곳에 또 만들 계획은 없다. 지역별로 소비자가 원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히데노리 CCC 사장은 닛케이에 “이곳은 츠타야의 전파탑과 같은 상징적인 장소”라며 “리테일 비즈니스의 미래를 개척하고 싶다”라고 했다.
◇백화점=명품? 모두가 같은 가치를 팔 순 없다
과거의 성공 공식이 어디서나 통하지 않는 건 한국 유통업계도 마찬가지다. 지역의 고급 소비를 담당하던 백화점의 경우 도시 간 이동이 수월해지면서 명품과 유명 브랜드를 품은 대도시의 일부 초대형 점포가 시장의 파이를 나눠 가지게 됐다. 지난해 연간 거래액 1조원이 넘는 백화점은 3조원을 돌파한 신세계 강남점과 롯데 잠실점을 포함해 12개였다. 그러나 지방과 변두리에선 연간 거래액이 2000억원이 안 되는 백화점이 18개에 달했다.
이렇다 보니 최근 들어 지방 소규모 백화점을 중심으로 문 닫는 곳이 늘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매장 면적이 작은 매출 하위권 점포 10곳의 구조를 조정하기로 하고, 지난해 6월 마산점을 폐점했다. 그랜드백화점, 세이백화점 등 지역 백화점도 자취를 감췄다. 대형마트도 비슷한 수순을 밟고 있다.
오프라인 점포의 쇠락 뒤엔 온라인 쇼핑의 성장과 불황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모든 점포가 하나의 포맷만을 고수한 것이 문제라는 분석도 나온다. ‘백화점=명품’이라는 성공 공식에만 맞추다 보니, 유명 브랜드 유치가 어려운 소규모 점포는 경쟁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업계는 새로운 포맷을 실험하고 있다. 현대백화점(069960)은 전통적인 형태의 백화점과 복합쇼핑몰을 결합한 서울 여의도 ‘더현대’에 이어 중소형 지방 점포에 초점을 둔 ‘커넥트’ 포맷을 내놨다. 지난해 9월 매출 최하위 점포인 부산점을 재단장(리뉴얼)해 개장한 커넥트현대는 백화점의 상징인 명품 대신 젊은 세대에 인기 있는 K패션 브랜드와 맛집, 지역 브랜드 등을 들였다. 벨기에 고급 초콜릿 브랜드 고디바의 카페 국내 1호점도 유치했다.
그 결과 커넥트현대의 개점 한 달간 매출은 전년 대비 42% 증가했다. 7%대였던 MZ세대(밀레니얼+Z세대, 1980~2004년생) 고객 비율은 6배 넘게 증가했다. 이에 힘입어 현대백화점은 충북 유일 백화점이자, 역시 매출 하위권 점포인 충청점을 올해 커넥트현대로 재단장할 예정이다.
시부야 츠타야처럼 니치 마켓(틈새시장)을 공략해 차별화한 곳도 있다. 서울 용산에 있는 아이파크몰은 전자 제품과 게임의 성지라는 지역 특성을 살린 전략으로 덕후와 키덜트(어린이 취향을 가진 어른) 고객을 끌어모았다. 건담, 티니핑, 포켓몬, 닌텐도, 쿠키런, 명조, 나가노마켓 등이 이곳을 통해 국내에서 첫 캐릭터 팝업 매장을 선보였다. 작년 9월 운영한 나가노마켓 팝업스토어의 경우 사전 예약에 18만 명이 동시에 접속해 예약 서버가 다운됐다. 굿즈를 200만원어치나 산 고객도 있었다.
또 쇼핑몰 옥상에는 풋살장과 함께 국내 처음으로 빠델 구장을 조성했다. 빠델이란 테니스와 스쿼시를 혼합한 스포츠로, 최근 유럽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 2021년 3500억원 수준이던 아이파크몰의 연간 거래액은 지난해 약 5400억원으로 증가했다. 멤버십 고객의 60%는 20~30대다.
HDC아이파크몰 관계자는 “처음 콘텐츠를 도입했을 때만 해도 캐릭터 팬 고객이 많았지만, 콘텐츠 팝업과 함께 식음료(F&B) 업장을 강화하면서 가족 단위 등 다양한 세대가 찾고 있다”면서 “오는 2월에는 ‘키보드 페스티벌’을 진행하고, 하반기에는 3층 리빙 공간 개편을 완료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인호 비즈니스인사이트 부회장은 “초경쟁 시대에는 로케이션(위치), 포맷마다 다른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면서 교토의 대표 기업인 닌텐도와 협업해 ‘마리오 박물관’을 개설한 다카시마백화점 교토점을 예로 들었다. 작은 백화점일수록 독자적인 콘텐츠로 고객 로열티를 획득해야 한다는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