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004170)그룹 총괄부회장이 8일 신세계그룹 회장으로 승진했다. 본격적인 2세 경영 체제가 열렸다.

주력 회사인 이마트(139480)가 사상 첫 적자를 기록하는 등 급변하는 유통 환경에서 위기에 빠진 신세계에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2006년 11월 부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지 18년 만이다.

정 회장의 모친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은 그룹 총괄회장으로 총수 역할을 유지하며 지원사격에 나선다. 동생 정유경 신세계백화점 총괄사장도 자리를 지킨다.

신세계그룹은 "녹록지 않은 시장 환경 속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룰 혁신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최고의 고객 만족을 선사하는 '1등 기업'으로 다시 한번 퀀텀 점프하기 위해 이번 인사를 단행했다"고 밝혔다.

정용진 회장./신세계 제공

◇18년만에 회장 오른 정용진… 위기 극복 과제

정 회장의 임무는 막중하다. 쿠팡이 이마트 매출을 앞지른 가운데 중국 이커머스인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의 공습도 거세다. 격변하는 유통시장 환경에서 뒤쳐진 그룹의 경쟁력을 회복하고 성장궤도에 올려야 한다.

유통 공룡이 된 쿠팡은 지난해 창립 13년 만에 매출액 30조원을 넘기고 흑자 전환했다. 경쟁 상대인 이마트 매출도 앞질렀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간 로켓배송 등을 기반으로 급격히 성장한 쿠팡은 유통 시장 판도를 바꿨다.

반면 신세계 그룹 주력이자 업계 1위였던 이마트는 지난해 사상 최대의 매출을 올렸지만, 연결 기준 469억원으로 적자 전환했다. 사상 첫 적자다.

신세계건설의 실적 부진이 주된 원인이었지만 이마트 별도 이익만 따져도 1880억 원으로 1년 새 48% 감소했다. 이커머스 계열사인 SSG닷컴과 G마켓도 적자를 극복하지 못해 유통과 비유통이 모두 부진했다.

설상가상으로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등 중국 플랫폼 공세에 유통 시장은 한치 앞을 내볼 수 없게됐다. 알리익스프레스는 지난달 모바일앱 사용자수 기준으로 쿠팡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등 전해전술로 빠르게 한국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정 회장은 이마트의 본업 경쟁력을 되찾는 등 기존 주력 사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미래 성장 동력이 될 신사업을 끊임없이 발굴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

◇ 80대 이명희 회장, 그룹 후계자 구도 공고히...경영효율화 작업 본격화

정 신임 회장의 승진으로 '정용진 체제'로의 개편이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정 회장의 그룹 장악력이 한층 강화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80대인 이명희 회장이 그룹 후계자 구도를 공고히 했다는 시각도 나온다. 정 회장이 50대 중반인 만큼 회장 자리를 승계할 시기라는 분석이다. 동갑인 사촌 이재용 삼성 회장을 비롯해 정 회장보다 두 살 어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열 살 어린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이 이미 회장 직함을 달고 활동하고 있다.

정 회장이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선 신호는 이미 작년부터 감지됐다. 작년 9월 사장단 인사에 이어 단행된 경영전략실 인사를 정 회장이 직접 관장하면서 강력한 '친정 체제' 구축의 신호탄을 쏜 것이다. 경영전략실은 정 회장의 경영 활동을 보좌하는 참모 조직으로 사실상 그룹의 '콘트롤 타워' 역할을 한다. 정 회장은 인사 후 첫 회의에서 "조직, 시스템, 업무처리 방식까지 다 바꿔라"라고 주문하며 강도 높은 쇄신을 예고했다.

업계에서는 신세계그룹 내 구조조정과 경영 효율화 작업이 본격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마트는 2019년 창사 후 사상 첫 분기 적자를 맞아 당시 이갑수 대표를 비롯한 임원 조기 퇴진 및 매각·자산 유동화 등 구조조정 작업을 진행했다. 연간 첫 적자라는 더 큰 위기 앞에서 쇄신이 예상되는 이유다.

정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조직은 성과를 내기 위해 존재하고 기업은 수익을 내야 지속 가능할 수 있다"면서 "2024년에는 경영 의사 결정에 수익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세계 그룹 측은 "정 회장 승진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며 "과거 '1등 유통기업' 자리에 머물지 않고 한 단계 더 도약할 갈림길에 서 있는 신세계그룹이 정 신임 회장에게 부여한 역할은 막중하다"고 설명했다.

◇총수·지분구조는 변경 없어… 상징 조치 해석도

다만 이 회장이 그룹 총괄회장으로 총수(동일인) 지위를 유지하면서, 백화점 사업을 진두지휘하는 정유경(52) 총괄사장 지위에는 변동이 없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이 총괄 회장은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막내딸이자 고 이건희 회장의 동생으로 주부로 자녀들을 키우다가 40대에 여성 경영자로 나서 신세계그룹을 키웠다. 앞서 작년 9월 그룹 대표이사 40%를 물갈이한 대규모 인사가 이 총괄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이뤄지며 이 회장의 경영 일선 복귀 설도 나왔다. 당시 인사로 한채양 이마트 대표 등 신세계그룹 전략실 출신 인사들이 대거 배치됐는데, 신세계그룹 전략실은 이명희 회장의 직속 조직이다.

지분 구조 역시 변동이 없다. 신세계 계열 지분구조를 보면 정용진 회장과 정유경 총괄사장이 각각 이마트와 신세계 지분을 18.56% 보유하고 있다. 이명희 총괄회장이 이마트와 신세계 지분을 10.00%씩 갖고 남매 경영을 뒷받침하면서 신세계그룹 총수(동일인) 지위도 유지하고 있다.

정용진과 정유경 사장은 2020년 9월28일 이명희 회장으로부터 각각 이마트와 신세계 지분 8.22%씩을 증여받아 1대주주가 됐다. 신세계그룹은 2015년 12월 정유경 신세계백화점 부사장을 백화점 총괄사장으로 승진시키면서 '남매 경영 시대'를 본격화했다. 정 부회장은 이마트·식품·호텔 부문을, 동생 정유경 총괄사장은 백화점과 면세점, 패션 부문을 각각 맡아 경영해왔다.

남매간 분리 경영을 기조로 하는 승계 작업이 이 과정에서 일단락됐다는 평가를 받지만, 정 회장 체제에서 그룹 장악력 강화를 위한 추가 지분 증여가 이뤄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다만 이에 따르는 증여세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과제다. 앞서 정 회장과 정유경 사장은 2006년 부친 정재은 명예회장으로부터 지분을 물려받을 때 3500억 원의 증여세를 신세계 주식으로 현물납부했다. 2020년에는 2962억원의 증여세를 자신들이 보유한 이마트와 신세계 지분을 담보로 제공하고 분할납부하는 방식을 택했다.

구체적으로 정 회장은 증여세 1922억원을 이마트 주식 140만주(5.02%)를 납세담보로 제공하고 5년 동안 분할납부하기로 했다. 이후 정 회장이 2021년 9월14일 광주신세계(037710) 지분 52.08%를 모두 신세계에 2285억원에 매각, 이를 증여세 재원으로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