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왕국’ 일본의 편의점들이 자체 패션 브랜드(PB)를 잇달아 출시하고 있습니다. 편의점에서 양말이나 속옷 등을 사 본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사실 편의점 옷은 품질이 떨어지고 가격이 비싸다는 인식이 있죠. 급해서, 어쩔 수 없이 구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 편의점들은 디자이너와 제대로 된 ‘옷’을 만들고, 심지어 패션쇼도 열었습니다. ‘대박’을 친 상품도 있다는군요.
편의점 옷의 유행을 이끈 건 패밀리마트입니다. 지난해 11월 30일 도쿄 하라주쿠에서 자체 의류 상품을 선보이는 패션쇼를 열었습니다. 편의점을 모방한 무대로 모델들이 편의점을 드나드는 모습을 연출하고, 가맹점 근무자 30여 명을 피날레에 세웠죠. 회사 측은 “편의점에서 옷을 파는 문화가 생긴다는 걸 즐겁게 표현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편의점 옷은 평범할 거 같지만, 이날 등장한 옷들은 고정관념을 깼습니다. 아자부다이힐스 매장에만 한정판으로 출시된 9990엔(약 8만9900원)짜리 청재킷과 1만9990엔(약 18만5000원)짜리 벤치 코트를 비롯해 파랑, 보라, 핑크 등 다채로운 색상을 접목한 의류가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패밀리마트는 2021년 3월부터 ‘컨비니언스 웨어’라는 브랜드명으로 옷을 팔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편의복’이죠. 파리 컬렉션에 참가한 패션 디자이너 오치아이 히로미치가 디자인하고, 패밀리마트 모 회사인 이토추 상사로부터 섬유를 공급받아 가격을 낮췄습니다. 대표 상품인 스웨트셔츠와 바지의 가격은 2990엔(약 2만6932원) 수준입니다.
처음엔 양말, 손수건, 티셔츠 등 100여 품목을 출시했는데, 이중 패밀리마트의 주조 색인 파랑과 녹색이 들어간 양말이 소셜미디어(SNS)에서 화제를 모으며 출시 1년 만에 100만 켤레, 현재까지 누적 1500만 켤레 넘게 팔렸습니다. 한화로 4000원이 안 되는 가격이니, 이 양말만으로 600억원가량의 매출을 거둔 셈입니다.
자신감이 붙은 회사는 이후 카디건, 반바지, 샌들 등으로 품목을 확대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1990엔(약 1만7900원)짜리 반바지가 품귀 현상을 빚었다고 합니다.
패밀리마트에 따르면 2022년 3월부터 1년간 ‘컨비니언스 웨어’ 매출은 전년 대비 60% 증가했고, 지난해에는 40% 정도 성장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여성 고객이 늘었다고 합니다.
일본 편의점 체인 로손도 지난 16일 편집숍 프릭스 스토어와 함께 ‘로손 프릭’이라는 의류 브랜드를 출시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살 수 있고, 입을 수 있는 옷’을 콘셉트로, ‘인스턴트 니트’를 첫 상품으로 내놨습니다. 가격은 2970엔(약 2만6755원).
로손은 이 상품을 자체 온·오프라인 스토어와 일본 최대 온라인 쇼핑몰 조조타운 등에서 판매 중입니다. 앞서 로손은 1만 개 매장에서 무인양품의 양말과 가방 등을 판매하기도 했지요.
일본만이 아닙니다. 미국 세븐일레븐은 지난해 8월 자사의 기념품(굿즈)을 판매하는 세븐컬렉션(7Collection) 홈페이지에 ‘컨비니언스 투어’라는 골프복을 내놨습니다. 세븐일레븐의 브랜드 색인 초록, 빨강, 주황을 조합해 의류와 텀블러, 보랭 백 등 30종을 선보였는데, 가장 비싼 제품이 50달러(약 7만원) 수준이니 골프복치고 꽤 저렴한 편이지요. 덕분에 세븐일레븐 로고가 들어간 1970년대풍 셔츠는 일찌감치 매진됐습니다.
편의점들은 기존에도 의류 상품을 취급해 왔습니다. 하지만 매장 규모에 한계가 있어 속옷과 양말, 가방 등으로 품목이 제한됐죠. 일본 편의점 1위 세븐일레븐의 경우 급하게 출장을 떠나는 직장인을 겨냥해 비즈니스 셔츠를 팔기도 했지만, 패션보다는 생필품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최근 일본 편의점들은 브랜드 팬과 고정고객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패션 사업에 뛰어드는 모양새입니다.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든 만큼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죠.
패밀리마트의 경우 디자인을 심플하게 하는 대신, 다양한 색상을 접목하고 기능성 소재를 사용해 패션 상품으로서 가치를 높였습니다. 그 결과 SNS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더 많은 고객이 매장을 방문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호소미 켄스케 사장은 “‘컨비니언스 웨어’는 예정되지 않은 숙박이나 갑작스러운 비 등 긴급 수요에만 대응한다는 상식을 뒤집었다”면서 “걸어서 5분 거리 편의점이 패션 매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경쟁사와 차별화하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일본 편의점 시장에서 패밀리마트와 로손은 세븐일레븐에 이어 각각 2, 3위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니케이아시아는 패밀리마트에 대해 “매장당 일 매출을 보면 여전히 세븐일레븐보다 10만엔(약 90만원) 이상 뒤지고 있다”라며 “패션 상품을 강화하는 것은 패밀리마트를 경쟁사와 차별화하는 동시에 PB 식품 및 음료에 투자하기 위한 또 다른 노력”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국내 편의점은 어떨까요? 국내 편의점은 일본 편의점에 비해 매장 규모가 작아 패션 상품을 파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한국편의점협회에 따르면 국내 편의점의 평균 면적은 72㎡(약 22평), 일본은 132㎡(약 40평)로 현저히 작습니다. 속옷이나 양말을 팔기는 쉽지만, 일본처럼 부피가 큰 옷을 팔긴 어렵지요.
그럼에도 편의점은 계속해서 차별화를 시도하는 모습입니다. 이마트24는 올겨울 패딩 조끼와 패딩 목도리, 발열내의, 레깅스 등 방한 의류 13종을 선보였습니다. 편의점과 패션을 접목했는 의미로 ‘편웨어(편의점+웨어)’라는 이름도 붙였죠. 이 편의점은 2022년에는 코오롱스포츠와 협업해 패션 상품 15종을 선보인 바 있습니다.
편웨어 판매를 시작한 지난해 11월부터 현재까지 이마트24의 의류잡화 상품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7% 증가했습니다. 이마트24 관계자는 “글로벌 트렌드를 보고 새롭게 시도해 본 것인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다”라며 “편의점에서도 품질 좋은 의류 상품이 고객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수요가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한국 편의점도 일본 패밀리마트처럼 양말을 패션화하는 건 어떨까요. 로손처럼 온라인으로 유통망을 확대하는 방안도 고려해 봄 직합니다.
하지만 패션 사업을 위해선 우선 브랜딩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GS25 티셔츠, CU 반바지가 팔리려면요.
한 편의점 관계자는 “편의점은 오프라인 점포를 기반으로 하는 만큼 객단가를 높이고 숨어있는 고객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에 나서야 한다”며 “과거엔 편의점에서 와인을 팔기 어렵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편의점 와인이 보편화됐듯 패션이든 뭐든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