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체인, 옛날에는 대단해 보였는데 이제 별거 아니잖아요. 브랜드가 뭐 별건가요? 디테일하고, 정성스럽고,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하려고 하는 게 브랜드죠.”

지난 7월 부산 ‘빌라쥬 드 아난티’에서 만난 이만규 아난티 대표는 토종 브랜드로 16만㎡ 규모의 리조트를 어떻게 짓게 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브랜드 뭐 별거냐’며 되묻는 그의 당당함이 꽤 인상 깊게 남았는데요.

호텔·리조트 전문 기업 아난티(025980)가 내년부터 부산 기장군에 위치한 ‘아난티 힐튼 부산 호텔’의 명칭을 ‘아난티 앳(@) 부산 코브’로 변경합니다. 앞서 ‘힐튼 남해 골프 앤 스파 리조트’에서 힐튼을 뗀 데 이어, 부산에서도 힐튼과의 계약을 종료한 것이지요.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 있음에도 독자 경영을 추진한 배경은 무엇일까요?

자체 적립 프로그램 '림(RIM)'을 알리는 아난티의 광고. /유튜브 캡처

아난티와 힐튼의 인연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골프장 사업을 하던 에머슨퍼시픽(현 아난티)이 ‘한국에 없는 리조트를 만든다’는 포부로 땅끝 마을 남해의 갯벌을 메워 골프장과 리조트를 건설한 후 글로벌 호텔 체인 힐튼에 리조트 운영과 서비스 등을 맡기면서입니다. 힐튼이 국내 리조트 사업에 참여한 건 처음이었죠.

‘힐튼 남해 골프 앤 스파 리조트’는 문을 열자마자 대성공을 거둡니다.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받던 남해라는 입지가 대중에게 신선함으로 다가간 데다, 민성진 건축가가 설계한 아름다운 건축물과 힐튼의 글로벌 서비스까지. 힐튼 남해는 ‘한국 리조트계 역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리조트 운영에 자신이 생긴 회사는 2008년 ‘아난티(Ananti)’라는 독자 브랜드를 내놓습니다. 당시 금강산 관광특구에 추진하던 골프 리조트에 ‘금강산 아난티 골프&온천 리조트’라는 명칭을 붙인 건데요.

브랜드명 아난티는 글로벌 호텔 운영 시스템을 경험하며 독자 브랜드의 필요성을 실감한 이만규 대표가 브랜드 컨설팅사에 의뢰해 지은 것입니다. 특별한 의미는 없고, 설레는 느낌을 주는 발음에 집중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소비자 중엔 아난티를 해외 브랜드로 인식하는 분들도 꽤 많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금강산 사업은 정리됐지만, 브랜드 ‘아난티’는 살아남았습니다. 회사는 2016년 가평에 ‘아난티 코드’를 연 데 이어, 2018년 힐튼 남해의 간판을 ‘아난티 남해’로 바꿔 달았습니다.

그해 4월엔 사명도 아난티로 변경했죠.

그래픽=정서희

‘힐튼 부산’의 명칭 변경은 예견된 수순으로 보입니다. 아난티는 2017년 개관 당시 ‘힐튼 부산’이란 이름으로 5성급 호텔을 열고 운영권을 힐튼에 일임하는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20년 아난티 힐튼 부산으로 변경하며 운영권을 가져왔습니다. 운영은 아난티가 하고, 힐튼과는 브랜드명과 글로벌 예약망을 공유하는 프랜차이즈 계약으로 축소한 것이지요. 내년부터는 계약을 종료하면서 힐튼 예약망은 물론 멤버십 프로그램에서도 빠지게 됐습니다.

이미 아난티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힐튼’이라는 명칭을 지워냈습니다. 자체 적립 프로그램 ‘림(RIM)’을 알리기 위해 ‘혜림이, 태림이, 채림이만 있으면 아난티에 갈 수 있다’며 언어유희를 사용한 광고를 송출하기도 했죠.

흥미로운 건 계약 만료에 맞춰 이름을 바꾼 남해와 달리, 부산의 경우 계약 기간이 아직 남아있다는 건데요. 이와 관련 이만규 아난티 대표는 지난 7월 부산 빌라쥬 드 아난티 기자간담회에서 “아난티 힐튼 부산의 경우 힐튼과의 계약이 5년 이상 남았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대표의 설명이 맞다면 아난티는 수십억원의 위약금을 물고도 계약을 파기한 셈인데요, 이에 대해 회사 측은 힐튼과의 계약 종료보다는 ‘독자 경영’에 주목해 달라고 강조합니다.

아난티라는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호텔 브랜드명을 ‘아난티 앳+지역명’으로 일원화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이미 아난티 앳 강남이라 명칭을 쓰는 서울 호텔 외에 부산 빌라쥬 드 아난티 내에 위치한 호텔 아난티 앳 부산도 내년부터 ‘아난티 앳 부산 빌라쥬’로 변경됩니다.

아난티 관계자는 “호텔 브랜드가 3개가 되면서 호텔 사업을 전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명칭을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라며 “금전적 부담은 후순위로, 아난티만의 독창적인 콘셉트와 철학을 알리는 것에 집중할 방침”이라고 했습니다.

아난티가 호텔 브랜드명 을'아난티 앳'으로 통합한다. /아난티

과거 이만규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브랜드 사업을 반도체 산업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많은 투자를 통해 회사의 위상이 독보적으로 올라서는 순간, 엄청난 수익을 거둔다는 의미인데요, 시장에서는 그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그간 호텔·리조트 개발 사업에 치중됐던 아난티의 역량이 레저 플랫폼 운영사로서 확장될 거란 전망입니다.

증권가에 따르면 아난티는 업황 대비 10% 이상 높은 객실 점유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아난티 앳 강남의 경우 성수기가 지난 4분기에도 87%가량의 투숙률을 유지하고 있지요. 자체 브랜드인 탓에 객실 점유율이 감소하는 시기에는 객실 보수나 시설 투자가 유연하게 이뤄지기도 합니다. 아난티 앳 강남의 경우 지난 3월부터 4개월간 새단장 공사를 진행하기도 했지요.

한 호텔업계 관계자는 “좋은 점이 많으면 계약을 파기하겠나”라며 “힐튼과 같은 글로벌 체인과의 파트너십엔 전 세계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이 뒤따르는데, 브랜드 정체성이 어느 정도 잡힌 아난티로서는 그런 계약이 불필요하게 여겨졌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난티의 올해 3분기 누적 연결 기준 매출은 8061억으로 전년 대비 245% 증가했습니다. 이중 분양 매출은 6747억원으로 전년 대비 512% 늘었고, 운영 매출은 1314억원으로 7%가량 증가했습니다.

연매출은 빌라쥬 드 아난티의 분양 선수금이 매출로 전환되면서 1조원 돌파가 점쳐지는 상황입니다. 국내 호텔 리조트 업계에선 앞서 대명소노그룹이 2020년과 2021년(연결 매출 기준) 연 매출 1조원을 달성한 바 있습니다.

곽민정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2024년은 분양이 아닌 운영 중심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며 “온라인 플랫폼 활성화를 통해 이터널저니의 매출 성장세가 100% 증가하는 등 새로운 고객과 시장으로 확장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