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밤 10시, 서울 강남동 청담동 패션 편집매장 분더샵 청담에서 열린 ‘신세계x프리즈 VIP 파티’에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이 목격됐다. 그는 블랙 수트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채 호스트로 등장, 손님을 맞았다. 이날 파티에는 500여 명의 미술 및 패션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정 총괄사장은 좀처럼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은둔의 경영인’이라 불린다. 그런 그가 수백 명이 참석한 파티장에 등장했다는 건 이번 프리즈 행사에 얼마나 애착을 갖는지 짐작게 한다.
유통업계에는 미술을 사랑하는 오너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을 넘어 사업장에 전시하거나 직접 갤러리를 운영하는 보폭을 넓히고 있다. 최근에는 소비문화가 성숙해지고 미술 작품을 통해 취향과 문화를 소비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직접 미술품 판매에 뛰어들기도 한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아모레G(002790)) 회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미국 미술 전문 매체 아트뉴스가 선정한 ‘세계 200대 컬렉터’에 여러 차례 선정된 미술 애호가로 “가업을 이어 경영인이 되지 않았다면 미술 평론가가 됐을 것”이라 밝혔을 정도다.
1979년 태평양화학(주) 부설 태평양박물관을 설립하며 고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소장 작품은 조선시대 달항아리인 백자대호(보물 제1441호)와 고려시대 불화 ‘수월관음도’(보물 제1426호)부터 로버트 인디애나의 팝아트 작품 ‘LOVE’까지 시공간을 초월한다.
특히 고미술품 수집가였던 아버지 고 서성환 회장의 영향으로 달항아리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2017년에 지은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은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달항아리를 형상화해 설계했고, 최근 리뉴얼한 설화수 용기도 달항아리에서 영감받아 디자인됐다.
2018년에는 사옥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을 열고 굵직한 전시를 열고 있다. 현재는 프리즈 서울 전시 개관에 맞춰 개념 미술 대가 로렌스 위너의 개인전을 아시아 최초로 선보였다.
박문덕 하이트진로(000080) 회장도 이름난 미술계 컬렉터다. 젊은 적부터 미술을 좋아해 국내외 작가의 작품을 다수 수집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사옥에 전시 공간을 꾸민 것은 물론, 경기 여주시에 위치한 골프장 블루헤런 CC에 200여 점의 미술 작품을 전시해 ‘갤러리 같다’는 호평을 얻었다. 업계에 따르면 블루헤런 CC는 국내 골프장 중 가장 많은 미술품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외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주로 소장하는데, 그림, 조각, 사진, 대형 설치 작품 등 장르를 망라한 수집력을 보여준다. 청담동 사옥에는 서도호의 대형 설치 작품 ‘인과’를, 블루헤런 CC에는 콜롬비아 출신 작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버디 버드’ 작품을 전시했다. 하이트문화재단은 제프 쿤스의 ‘리본 묶은 매끄러운 달걀’을 비롯해 백남준, 문신, 이우환, 안규철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박 회장은 특히 1970년대를 풍미한 권진규 작가에 애정을 갖고 그의 조각 작품을 수집하고 추모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30여 년간 권 작가의 추적해 20여 점을 모았다.
김웅기 글로벌세아그룹 회장은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 작가의 ‘우주 5-IV-71 #200′를 132억원에 낙찰받으면서 미술계 큰 손으로 부상했다. 김 회장은 한국 미술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이 작품을 구매하며 “국보 같은 작품은 해외로 유출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낙찰받았다”고 밝혔다. 지난해엔 서경배 회장과 함께 아트뉴스의 ‘세계 200대 컬렉터’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글로벌세아 사옥과 레스토랑에는 쿠사마 야요이, 장 미쉘 오토니엘, 우고 론디노네, 이우환 등 국내외 미술 거장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자체 갤러리 S2A도 운영한다. 지난달 31일부터 현대 미술가 에드가 플랜스의 국내 첫 단독 전시를 열고 있다.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은 미술품 수집에 일가견이 있는 할아버지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과 어머니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영향으로, 예술에 대한 관심을 사업에 접목해 왔다. 그는 이화여대 응용미술학과를 전공하고, 미국 로드아일랜드대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다.
신세계(004170)는 1963년 신세계화랑을 시작으로 업계 최초로 갤러리팀을 운영하고 있다. 2007년 신세계백화점 본점 명품관을 개장하면서 이명희 회장이 200억대의 미술품을 구입해 백화점 곳곳에 설치했고, 2011년에는 보라색 사탕봉지 모양의 1.7톤짜리 제프 쿤스의 작품 ‘세이크리드 하트’를 380억원대에 구입해 옥상에 설치했다. 업계에 따르면 신세계가 갖고 있는 미술품은 1000억원 대 이상으로 추정된다.
2021년에는 서울옥션(063170) 지분 4.8%를 280억원에 취득해 미술품 시장 진출을 예고했다. 지난해엔 서울옥션 최대 주주인 이호재 서울옥션 회장의 지분을 인수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철회했다. 신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미술 사업을 확대할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세계는 이번 프리즈 서울의 공식 파트너사로 참여해 수 개월간 행사를 준비했다. 프리즈 서울이 열리는 코엑스 행사장 내부에 신세계 VIP 라운지를 선보이는가 하면, 자사 편집숍 분더샵 청담에 신세계 갤러리를 개관했다. 정 총괄회장은 라운지의 인테리어를 거듭 수정하는 등 행사 관련 내용을 일일이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부진 호텔신라(008770) 사장도 빼놓을 수 없다. 미술에 관심 많은 삼성가의 일원인 그는 신라호텔을 갤러리형 호텔로 변신시켰다. 2006년 서울 신라호텔 로비에 설치한 박선기 작가의 대형 샹들리에 작품 ‘조합체(An Aggregation) 130121′은 호텔 방문객이라면 꼭 ‘인증샷’을 찍고 갈 정도로 이 호텔의 상징이 됐다.
지난달부터는 프리즈 서울에 맞춰 이배 작가의 붓질 시리즈 신작 2점을 전시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호텔신라는 국내외 작가의 미술작품 2000점 이상을 보유하며 호텔 곳곳에 전시하고 있다.
이외에 전필립 파라다이스(034230)그룹 회장은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내에 2700여 점의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 호텔 내 전시 공간에서 영국 미술 경매사 소더비와 함께 뱅크시와 키스 해링의 특별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도 미술계 소문난 컬렉터다. 특히 조각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그는 지난달 31일 서울 뚝섬 한강공원에서 시작한 ‘한강 조각 프로젝트’를 3년째 개최하고 있다.
미술계 한 관계자는 “기업 오너들은 주로 해외 아트페어나 갤러리를 통해 작품을 구매한다”며 “오래 미술을 공부한 분들이라 안목이 높아 대작들만 구매하기 보다 향후 가치가 있는 유망 작가의 작품들도 선호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