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의 루이비통 메종 서울. 10년 만에 다시 손을 맞잡은 일본 거장 아티스트 쿠사마 야요이와 루이비통의 아트(예술) 콜라보레이션(협업) 작품이 전시된 곳이다. 스니커즈부터 가방, 액세서리 등이 마련돼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쿠사마 야요이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물방울무늬가 고동색의 루이비통 가방을 캔버스 삼아 펼쳐져 있는 ‘온더고 MM’. 그 옆으로는 ‘네오네오 BB’가 붉은색 바탕에 하얀 도트 무늬로 시선을 끌고 있었다. 가방 한 쪽으로는 작가의 또 다른 상징인 호박 모양의 탈착형 참(charm) 장식도 달려 있었다.
명품과 미술의 만남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명품뿐 아니라 카펫·수전·거울과 같은 생활용품 브랜드들도 미술과의 협업 기회를 꾸준히 살피고 있다. 아트의 영역도 명화부터 팝아트까지 다양하다.
박소연 아트앤에디션 대표는 “과거엔 은행 달력에나 화가들의 작품이 실린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엔 다양한 소비재가 작품과 어우러져 고부가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면서 “소비재와 아트의 협업은 앞으로도 더 풍성해질 것”이라고 했다.
◇ 루이비통, 디올, 뱅앤올룹슨까지… 전부 아트에 빠졌다
최근 명품업계에서는 미술을 오브제(소비재)에 투영시키는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은 루이비통이다. 루이비통은 아트 콜라보레이션 효과를 가장 톡톡히 본 브랜드로 꼽힌다. 1997년 루이비통에 영입된 마크 제이콥스는 스티븐 스프라우스·리처드 프린스·쿠사마 야요이 등의 작가와 부지런히 협업을 추진했다.
루이비통은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작가와도 손을 잡았다. 지난해 10월 선보인 아티카퓌신 백 컬렉션이 대표적이다. 이 가방은 박 작가의 대표 연작 묘법 시리즈 중 2016년 작을 기반으로 디자인됐다. 작가가 작품에 구현한 촉감과 질감을 그대로 가방에 표현하기 위해 카프 스킨에 먼저 붓질 효과를 내고, 고도의 3D 고무 사출 작업을 가죽에 정교하게 적용했다.
루이비통 관계자는 “이 상품은 선보인 지 한 달도 안 돼 모두 판매됐다”면서 “다른 카퓌신 제품보다 약 200만원 정도 비싸도 소비자(컬렉터)의 선택을 받았다”고 했다.
루이비통만이 아니다. 세계 럭셔리 브랜드가 모두 한국 작가들과 협업에 나서고 있다.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디올은 한지를 활용한 현대미술가 김민정 작가와 협업했다. 이 작업에서 김민정 작가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시리즈인 ‘거리’ ‘스토리’ ‘붉은산’ 등을 가방에 녹였다.
김 작가는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작가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비움과 채움’은 작년 11월 뉴욕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18만9000달러(약 2억5000만원)에 낙찰됐다. 2006년 당시 이 작품은 400만원 정도에 판매됐다. 약 17년 만에 가격이 62배 올랐다. 그만큼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아트 콜라보레이션은 생활용품 전반으로 확산하는 중이다. 물방울 화가로 유명한 김창열 작가(1929~2021)는 덴마크의 명품 오디오 뱅앤올룹슨과 손을 잡았다. 스피커면 위에 김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물방울이 흘러내릴 듯 맺혀있는 이 작품은 지난해 롯데 아트페어에서 선보였고 다시는 구할 수 없는 희귀템(희귀 아이템)이 됐다. 김창열의 작품으로 만든 뱅앤올룹슨 한정판 스피커(‘Beoplay A9 김창열 에디션 by 프린트베이커리’)는 세상에 단 99개뿐이기 때문이다.
신세계그룹의 리빙·라이프스타일 기업 신세계까사는 최근 거울에 최근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접목했다. 도예와 회화를 넘나들며 확장된 예술 세계를 선보이는 갑빠오(KAPPAO)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상징하는 소년 캐릭터를 통해 다양한 인간의 마음을 작품에 투영하는 테즈킴(TEZ KIM), 사진을 기반으로 한 판화 작업으로 특별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김홍식이 대표적이다.
이 작업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리빙용품으로 확장될 예정이다. 신세계까사 관계자는 “아트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를 지속 확대하며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와 색다른 협업 활동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했다.
◇ MZ세대가 꽃피운 아트 콜라보 시장… “아트가 초(超)가치를 만든다”
명품부터 리빙용품까지 아트 콜라보레이션을 추진하는 이유는 뭘까. 대한민국 1호 아트 콜라보 디렉터인 한젬마 러쉬코리아 부사장은 “아트와 함께하면 상품 자체에 초(超)가치를 만드는 데 용이해진다”고 했다.
명품업계에서는 고루하다는 브랜드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명품은 유구한 역사와 이를 기반으로 한 고전적 이미지를 한 축으로 삼고 있지만, 가장 경계하는 것은 고루하다는 이미지를 얻는 것이다.
역사와 전통을 갖췄으나 시대정신에 뒤처지지 않는 신선함을 브랜드 이미지로 가져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장인정신과 희소성도 명품업계가 아트 콜라보레이션으로 강화하고 싶은 이미지다.
명품업계 관계자는 “가장 적극적으로 아트 콜라보레이션을 한 루이비통은 이를 통해 ‘힙(hip)하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아트콜라보레이션으로 루이비통의 매출이 약 4배는 늘어난 것으로 추산한다”고 했다.
리빙용품들의 변신은 미술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른 MZ세대(1980년대초∼2000년대초 출생)의 소비패턴 변화와 관계가 깊다. MZ세대의 소비패턴 중 하나는 바로 ‘취향 소비’다. 취향 소비는 과시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좋아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대상에 돈을 아끼지 않는 소비방식을 뜻한다.
주연화 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대학원 교수는 “MZ세대로 대표되는 젊은 층은 자기표현에 능하고 감성에 맞거나 선호하는 대상에 과감하게 몰입하는 특성이 있다”면서 “이들은 미술품이나 작가에 일종의 팬덤을 이루는 방식도 보이는데, 이 점이 아트와 오브제의 콜라보레이션을 촉진하는 이유”라고 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아트 콜래보래이션이 앞으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전통 클래식부터 팝아트까지 협업하는 아트군(群) 자체가 다양해지고 단순히 제품 디자인에만 국한되지 않고 마케팅 방식으로까지 확산될 것이라는 뜻이다.
신세계인터내셔날(031430)의 화장품 브랜드 연작이 아티스트 그룹 팀보타와 함께 전시회를 개최하고 연작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는 데 이바지한 것이 대표적이다. 팀보타는 자연을 소재로 한 설치 미술을 하는 아티스트 그룹이다. 전시회에서는 화장품에 담긴 향으로 후각을 자극하고 브랜드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패턴을 반복적으로 노출했다.
한젬마 러쉬코리아 부사장은 “10년 전만 하더라도 낯설고 부담스러웠던 아트콜라보레이션은 MZ세대가 주도한 아트 시장과 만나 빠르게 진화 중”이라면서 “MZ세대를 넘어선 아트세대는 아트 콜라보레이션의 다음 현상을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