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의 믿을맨' '샐러리맨 신화'로 통했던 차석용 LG생활건강(051900) 부회장이 물러난다.
24일 LG그룹은 'LG생활건강 2023 정기 임원인사'에서 차석용 부회장이 맡았던 LG생활건강 대표이사(CEO)에 이정애 음료 사업부장(사장)을 내정했다고 발표했다. 2005년 정기 임원인사에서 차 부회장을 CEO에 선임한 지 18년 만이다.
앞서 신학철 LG화학(051910) 부회장이 유임되며 올해 LG그룹이 변화보다 안정을 택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지만, LG생활건강 만큼은 변화를 맞게 됐다. 권봉석 LG(003550) 부회장,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373220) 부회장 등 '4인 부회장' 체제도 끝이 났다.
LG생활건강 측은 "20년 가까이 CEO 자리를 유지해 온 차 부회장이 후진에 길을 터주기 위해 용퇴를 결심했다"는 설명이지만, 재계에선 LG생활건강의 실적 역성장이 이른바 연속 성장 신화를 써온 차 부회장의 용퇴 결심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차 부회장은 CEO에 오른 이후 매년 성장을 이끌어 왔다"면서 "이른바 '차석용 매직'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지만, 이게 통하지 않게 되면서 그는 물론 그룹에서도 변화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차석용 매직' '신화'로 통했던 최장수 CEO
차 부회장은 LG그룹 내에서 '신화'로 불렸다. 1974년 경기고를 졸업, 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을 나온 그는 쌍용제지·한국P&G·해태제과 사장 등을 지내고 LG생활건강으로 자리를 옮겨 지난해까지 17년 연속 성장이란 진기록을 세웠다.
그의 전략은 사업군 다변화를 통한 실적 개선이었다. 생활용품과 화장품이 전부였던 LG생활건강 사업구조에 기저귀·생리대(2005년 진출)를 더하고, 코카콜라 인수(2007년)로 음료 시장으로도 뛰어든 게 성장의 발판이 됐다.
화장품 사업에서는 고가 브랜드 '숨'을 출시, 생활용품이 중심이었던 사업 구조를 화장품 중심으로 변경했다. 70%에 달했던 생활용품 비중은 25% 수준으로 낮아졌고, 화장품 음료를 통해 매출을 내는 구조를 만들어 냈다.
차 부회장의 취임 첫해 1조원이었던 LG생활건강의 매출은 현재 7조원 수준으로 늘었다. 2005년 1분기부터 지난해 3분기까지 한개 분기를 제외하고는 66분기 연속 영업이익 증가도 기록했다. 덕분에 지난해 한때 LG생활건강 주가는 100만원을 넘기도 했다.
◇ 중국 시장 부진 여파…분기 영업익 2000억원 아래로
하지만 올해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LG생활건강의 지난 1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9% 감소한 1조6450억원, 영업이익은 53% 감소한 1756억원이었다. 2분기에는 매출 7.9% 감소, 영업이익 36% 감소를 기록했다.
특히 지난 3분기 LG생활건강 매출은 전년 대비 7% 줄어든 1조8703억원을 냈고, 영업이익은 1901억원을 낸 것으로 집계됐다. LG생활건강의 분기 영업이익이 2000억원 이하로 떨어진 것은 2017년 4분기(1852억원) 이후 5년여 만에 처음이다.
화장품 사업의 부진이 뼈아팠다. 특히 중국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화장품 브랜드 후의 매출 하락 때문이다.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에 따른 봉쇄 여파가 컸다. 지난해 기준 화장품 사업 전체 매출의 66%를 차지한 후의 올해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1% 줄었다.
LG생활건강 관계자는 "후는 중국 의존도가 상당한 브랜드인데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에 따른 봉쇄와 후를 찾았던 현지 소비 심리마저 위축되면서 중국과 면세 채널에서의 성장이 부진했다"고 말했다.
◇ LG그룹 인사 키워드 '세대교체'도 영향
이런 가운데 차 부회장의 나이도 용퇴 결정에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차 부회장은 1953년생으로 2005년 CEO 취임 당시 이미 51세였다. 이후 18년을 계속 CEO 자리를 지키며 최장수인 동시에 최고령 CEO라는 평을 받았다.
특히 LG그룹은 구광모 회장 취임 후 꾸준히 세대교체를 정기 인사의 중점 키워드 중 하나로 내세우기도 했다. 실제 지난해 LG그룹은 최대 규모인 132명의 신임 상무를 발탁했는데, 신규 임원 중 40대는 82명으로 전체의 62% 이상을 차지했다.
화장품 업계 한 관계자는 "LG그룹 세대교체 기조에서 차 부회장이 CEO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세대교체보다 우선되는 실적이 있었던 덕"이라면서 "올해는 그를 지탱했던 성과마저 약해졌다"고 말했다.
LG생활건강은 시장 침체에 맞서 브랜드 마케팅을 강화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신임 CEO에 오른 이정애 사장은 헤어케어, 바디워시, 기저귀 등 다양한 제품군의 마케팅을 담당한 마케팅 전문가로 꼽힌다.
2015년 말부터는 고가 화장품 사업을 책임지며 '후' '숨' '오휘' 등 화장품 브랜드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글로벌 브랜드로 육성하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 내년 북미 시장에서의 화장품 브랜드 마케팅 강화도 예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첫 여성 CEO에 오른 이정애 신임 사장은 1963년생으로 이화여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 입사했다. LG생활건강 관계자는 이 신임 사장에 대해 "디테일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폭넓은 지식과 경험을 갖춘 전문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