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후 밸류에이션(Valuation·기업가치)이나 현금 흐름 가능성은 거의 믿지 않습니다. 초기 스타트업은 더 그렇습니다. 스타트업이 초기 모델로 성공한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요.”

‘어떤 기준으로 스타트업 투자를 결정하냐’는 질문에 롯데그룹의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롯데벤처스 투자를 총괄하는 배준성 상무는 이런 답변을 내놨다. 당장의 장밋빛 전망보다는 현실적인 목표와 그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우선한다고 했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생각보다 많은 스타트업 창업 멤버들이 이를 경시한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롯데벤처스 본사에서 만난 배 상무는 “오직 아이디어가 좋으니 투자해달라는 회사가 많다”며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본인들이 뛰어든 시장 분석도 잘 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건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22일 서울 강남구 롯데벤처스 본사에서 만난 배준성 상무. / 이현승 기자

롯데벤처스는 2016년 신동빈 회장이 사재 50억원을 출연해 설립한 이후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회사 측은 초기 스타트업을 기업가치 100억원 미만인 회사로 정의한다. 현재까지 236개 회사에 1552억원을 투자했다.

주요 투자 업체로는 지난 4월 코스닥시장에 성공적으로 상장한 초고화질 실감형 콘텐츠 제작사 포바이포(389140)와 고급 자전거 중고거래 플랫폼 라이트브라더스, 샐러드 배송서비스를 하는 프레시코드, 순식물성 대체식품을 개발하는 더플랜잇, 탈모 맞춤 솔루션 제공업체인 비컨, 드론 물류 플랫폼 파블로항공 등이 있다.

요즘 벤처투자업계는 투자 혹한기를 지나고 있다. 롯데벤처스가 올해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 L-CAMP(엘캠프) 참여사 15개를 뽑는데 1000개 가까운 회사가 지원했다. 벤처투자업계에서 엘캠프 인지도가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요즘 투자 받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배 상무는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지분율이 다소 희석 되더라도 투자를 받을 수 있을 때 많이 받아두는 게 좋겠다고 얘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창업주 입장에선 지분율 희석이 뼈아프겠지만 회사가 망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그는 “올해 투자를 받는 회사들은 기업가치가 낮아지고 지분 희석율도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롯데벤처스가 설립 초기 펀드를 조성하기 전 자본금으로 투자했던 회사들의 기업가치는 올해 상반기 기준 투자 시점 대비 3.3배로 커졌다. 1년 이상 투자한 기업의 수익률은 50%(평가금액 기준)다. 다음은 배 상무와의 일문일답.

-투자 기업을 선발하는 기준은.

“3년 뒤 밸류에이션이나 현금 흐름 가능성은 거의 믿지 않는다. 특히 초기 스타트업인 경우 더 그렇다. 스타트업이 초기 사업모델을 가지고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다. 중간에 피보팅(pivoting·기존 사업 아이템을 다른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 일어난다.

사업 아이디어가 일단 중요하고, 그걸 구현하기 위한 방법과 관련해 산업을 얼마나 잘 분석했는지,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본다. 회사가 어떤 골(goal·목표)을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제시하는데 실제로 이뤄질 가능성은 50%도 안된다. 다만 본인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를 했냐가 중요하다.

심사를 해보면 업계 경쟁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오직 아이디어가 좋으니 뽑아달라는 회사가 많다. 작게는 몇억원, 많게는 몇십억원을 투자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런 사례를 보면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롯데벤처스가 피보팅을 돕기도 하나.

“투자를 많이 한 기업의 재무제표가 안 좋아지고 있다면 일종의 경영 컨설팅을 하기도 한다. 가령 엔지니어 출신 창업자들이 연구개발(R&D) 비용을 지나치게 많이 쓰는 경우 그 부분을 지적하고 밸런스(balance·균형)를 잡아준다.

-투자한 기업 중 수익률이 좋았던 회사를 소개한다면.

“최근 상장한 포바이포가 있다. 8K(7680×4320 해상도) 초고화질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회사다. 작년에 프리IPO(상장 전 지분투자)로 20억원을 투자했는데 상장 첫날 따상(시초가가 공모가 대비 두 배로 형성되는 경우)을 하면서 기업가치가 100억원까지 올라갔다가 이제는 두배 수준이다.

벤처스 설립 초기에 자본금을 활용해 기업가치 6~10억원 정도로 투자했던 회사 중에 현재 기업가치가 1000억원을 넘고 외부에서 인수합병(M&A) 제안을 받거나 상장을 앞둔 회사들도 있다.”

-투자 기업을 선발할 때 롯데그룹과의 시너지 창출 가능성을 우선순위에 두나.

“시너지가 창출된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성장성이 높을 것 같다면 투자를 한다. 초기 스타트업은 계열사와 의미있는 협업을 하기는 어렵다. 회사가 기업가치 수백억원 수준으로 성장하고 사업모델이 확립돼야 협업이 잘 이뤄진다.

계열사와의 협업은 우리가 먼저 제안을 하는 경우도 있고 스타트업이나 계열사에서 먼저 요청할 때도 있다. 투자사 관련 기사를 전 계열사에 정기적으로 뉴스레터로 보내기도 하고 오픈 이노베이션 데이라는 행사를 열어 특정주제와 관련한 스타트업을 소개한다. "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투자사는.

“공장 자동화 솔루션을 보유한 스타트업 ‘글래스돔’이다. 기업들이 보유한 공장 기계의 개별 데이터를 한곳에 모을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중견·중소기업이 스마트 팩토리를 도입하려고 해도 개별 기계 데이터를 수기로 작성하던 관행 때문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해결해준다.

한국IBM, 삼성SDS에서 근무한 경력을 토대로 이런 솔루션은 분명히 니즈(수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벤처스 내부적으로는 회사 비전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힘들게 설득을 해서 작년 투자를 했다. 투자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미국 유명한 업체에서 M&A 제안을 받기도 했다.”

-요즘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심리가 좋지 않다.

“올해 2월까지만 해도 ‘코로나 때도 스타트업이 잘됐는데 끝나면 얼마나 더 잘 될까’라는 장밋빛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미국이 이자율을 확 올리며 상황이 급박하게 바뀌었다.

미국 주요 스타트업 상장사의 기업가치가 대부분 절반 이상 떨어졌고 10분의1까지 추락한 곳도 있다. 작년까진 괜찮은 스타트업이면 밸류에이션 상관 없이 투자를 했다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기업가치를 하향해서라도 투자를 유치하는 회사도 생겨나고 있다.

“다운 밸류(이전보다 낮은 기업가치)로 투자 받거나 직전 밸류에이션으로 투자를 유치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다행인 사례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 자금 상황이 어렵거나 런웨이(법인 통장의 잔고가 0원이 될 때까지, 스타트업이 생존할 수 있는 기간)가 몇개월 남은 곳은 다운 밸류로도 투자를 유치하기가 힘들다.”

-기업가치를 하향해도 투자를 받기 어려운 회사들은 어떤 곳인가.

“이전에 플랫폼 기업은 회원 수나 MAU(월간 활성 이용자 수), DAU(일일 활성 이용자 수), 페이지 뷰 같은 숫자를 가지고도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받은 투자금을 가지고 마케팅을 해 회사 규모를 늘렸다. 펀딩이 되는 것을 전제로 적자로 돌아가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투자자들이 이런 회사들을 예전에는 1조원 가치로 상장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봤다면 이제는 아무리 봐도 최대 2000억원, 최악의 경우 1000억원도 안될 것 같다고 생각해 펀딩을 못한다. 요즘 동종업계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면 투자심사위원회가 개점휴업 상태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그래서 허리띠를 졸라매는 회사들이 많다. 쿠팡도 수익성 개선 기조로 돌아섰다. 투자한 회사들에게 수익성을 중점적으로 보겠다고 얘기하나.

“초기 기업들은 아직 (재정 상태가) 위험하진 않지만 다들 우리가 얘기하기 전에 선제적으로 대응을 한다.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투자를 받을 수 있을 때 많이 받아두는 것도 괜찮다고 얘기한다.

예전에는 창업주 지분 희석률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지금은 그런걸 따질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올해 투자를 받을 수 있는 회사들은 밸류에이션도 많이 다운 되겠지만 희석율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향후 어떤 분야의 기업들이 유망할까.

“두 가지다. 인공지능(AI) 관련 업체들은 여전히 전도유망하다. 그런데 데이터를 넣어 딥러닝(심층학습)을 돌려 추천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준이 아니라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진일보한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기업이 나올 것이다. 콜센터를 완전히 대체하는 수준의 챗봇이라든지, 기업의 일부 프로세스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정도의 AI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회사가 유망할 것이다.

또 하나는 바이오·헬스케어 분야다. 기존에 헬스케어 사업이 맞춤형 영양제나 건강기능식품을 만드는 수준에 그쳤다면 종합 헬스케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나올 것이다. 유전자 분석을 통해 탈모나 피부 문제 등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이 많이 올라와있다.

-이런 회사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나.

“기존의 솔루션을 조금 더 좋게 만든다거나, 남의 힘을 빌리는 방식을 쓰는 회사들이 있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 같은 구독 서비스를 저렴하게 볼 수 있게 도와주는 플랫폼이 있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본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업모델이 국내에 한정될 수 밖에 없는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도도 떨어지는 편이다. 식품도 로컬리티(locality·지역성)가 강한 분야이지만 비건(vegan·채식주의)이나 대체육, 배양육 등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분야와 관련된 회사에 투자를 적극적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