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전 이베이 글로벌 지역사업부 총괄 대표가 이스라엘 패션 디지털 프린팅 업체 코닛디지털(Kornit Digital, 이하 코닛)의 보드 멤버(사외이사)이자 디지털 디렉터로 컴백했다.
이 전 대표는 국내 전자상거래(이커머스) 업계에서 입지전적 인물로 꼽힌다. 보스턴컨설팅그룹 부사장 출신으로, 2002년 옥션 사장에 취임했다.
2004년 미국 이커머스 업체 이베이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괄 대표를 지냈고, 2017년에는 유럽 지역을 총괄했다. 2019년 한국인 최초로 이베이 글로벌 지역사업부 총괄 대표를 역임했다.
이 전 대표는 2009년 이베이의 G마켓 인수를 이끌었다. 또 이베이코리아가 2005년부터 15년 연속 흑자 경영을 이어가는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이베이코리아가 신세계 매각된 후 회사를 떠났다.
그런 그가 패션 디지털 프린팅 업체의 '디지털 디렉터'라는 명함을 들고 유통업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달 29일 코닛이 국내에서 주최한 '패션 더 퓨처(Fashion the Future)' 포럼에서 만난 이 전 대표는 "20년 전 이베이에서 봤던 가능성을 코닛에서 보았다"라며 "디지털 세계의 성공 요소인 비전과 기술을 모두 갖고 있는 회사"라고 소개했다.
2002년 이스라엘에서 출범한 코닛은 미국 나스닥 상장사로, 아마존, 티몰, PVH, 아디다스 등 1400여 개 업체에 직접 의류(DTG·Direct to Garment) 프린터 및 운영 솔루션을 공급하고 있다.
잉크젯 프린터의 원리를 의류에 적용해 물 사용과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옷에 문양을 새긴다.
코닛은 지난해 매출 3억2200만 달러(약 4200억원), 영업이익 1279만 달러(약 167억원)를 거뒀다. 매출의 27%는 아마존에서 발생했다. 2026년에는 매출 10억 달러(약 1조3000억원)를 목표로 한다.
국내에선 생소한 분야지만, 패션업계에 따르면 주문형 인쇄(POD·Print-On-Demand)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전세계 POD 시장 규모는 약 49억 달러(약 6조4000억원)로, 2030년까지 연평균 26%씩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온라인 패션 수요 증가와 개인화·친환경 소비 확대의 영향으로 지속 성장하리라는 전망이다.
코닛은 디지털 인쇄 업체 메이비원과 파트너십을 맺고 올해 국내 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조선비즈는 이 전 대표를 만나 패션 및 이커머스 업계의 인쇄 혁신 방안에 대해 들어봤다. 다음은 이 전 대표와의 일문일답.
코닛에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지난해 로엔 코닛 대표를 만나면서 주문형 인쇄 시장에 대해 알게 됐다. 마치 20년 전 이베이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가능성을 느꼈다. 20년 전만 해도 온라인 쇼핑이라는 게 생소했지만, 지금은 보편화되지 않았나?
코닛은 디지털 세계에서 성공할 두 가지 요소를 갖고 있다. 바로 비전과 기술이다. 주문형(온디맨드) 인쇄를 통한 지속가능한(서스테이너빌리티) 패션 생태계를 만들고자 하는 비전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독보적인 기술을 갖췄다. 전체 매출의 16%를 연구·개발(R&D)에 투자할 정도다."
역할은 무엇인가.
"이사회 참가가 가능한 보드 멤버, 즉 사외이사다. 한국에선 사외이사 하면 일 년에 몇 차례 이사회에 참석하는 수준이지만, 이스라엘 기업은 비즈니스에 참여하는 것까지 요구하더라.
디지털 디렉터로서 아시아, 특히 중국 시장 확장에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중국 패스트 패션 업체 셰인(Shein)과 협력을 준비 중이다. 회사에 조인한 지 1년 정도 됐는데, 생각한 것들이 현실화되고 있어 재미를 느낀다."
국내에서 POD는 생소한 분야다.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이유는.
"다양한 패션 수요를 즉시 대처하면서 친환경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게 이유다. 현재 패션 산업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의 생산처에서 미리 대량생산을 하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고 재고 관리도 어렵다.
하지만 코닛 솔루션을 이용하면 소비자와 가장 가까운 센터에서 즉시 생산해 보내고 결제까지 마칠 수 있다. 코로나 시기 주요 국가의 봉쇄로 국제배송이 어려운 문제가 있었는데,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최소 주문 수량 없이 한 벌도 만들어 보낼 수 있다.
게다가 코닛은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연결하는 패션 솔루션도 개발 중이다. 가상세계에서 아바타에게 옷을 입히고, 이를 현실세계에서도 만들어 입도록 하는 플랫폼을 개발 중이다. 실제 옷을 가상 세계의 아바타에게 입히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기업들과 거래하나.
"아마존, 아디다스, 부후, 넥스트 등 전 세계에 이커머스 및 패션 고객사 1400여 곳을 보유하고 있다. 아마존이 제일 큰 고객으로, 코닛 시스템을 이용해 2015년부터 주문형 인쇄 플랫폼 '머치 바이 아마존(Merch by Amazon)'을 운영 중이다. 티셔츠나 후디, 모자 등을 원하는 디자인으로 주문해 아마존이 제작하는 방식인데, 마블, 디즈니 등이 참여하고 있다."
아마존과 같은 이커머스 플랫폼은 패션 판매에 약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아마존은 기존 패션업체가 하지 않는 주문형 패션 서비스를 빠르게 도입해 차별화를 시도했다. 물류창고에 프린터를 넣어두고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제작해 배송한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고객 반응에 실시간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마존은 주문이 많이 들어오는 디자인을 분석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계속해서 제안해 수요를 늘린다."
전통적인 인쇄 방식과 비교해 가격 메리트가 있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량 생산되는 의류와 생산 단가를 비교하면 저렴하지는 않다. 그러나 의류 생산 과정에서 물 낭비와 탄소 배출 등이 되지 않고 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 주문 처리 속도가 빠르고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메리트가 있다고 본다."
POD가 이커머스의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젊은 세대에겐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 낭비되는 걸 싫어한다. 몇 년 전만 해도 남이 쓰던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없었지만, 지금은 당근마켓이 잘 되고 있다. POD가 단지 재미있는 기술처럼 보이겠지만, 곧 개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패션을 만들어 파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커머스 업체는 두 가지 방법으로 대응할 수 있다. 오픈마켓처럼 창의적인 디자인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롭게 만들어 거래할 수 있는 마켓 플레이스를 열어주거나, '머치 바이 아마존'처럼 자체 브랜드를 만들고 디자이너를 고용해 다양한 디자인 의류를 바로바로 만들어 배달하는 방식이다. 코닛이 좋은 솔루션을 제공할 것으로 생각한다."
국내기업들의 반응은 어떤가.
"한국 기업들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패션뿐만 아니라 리빙업체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쿠션이나 침구에 고객이 원하는 문양을 적용해 주는 식이다."
이커머스 업계에서 많은 러브콜을 받았을 텐데, 복귀 계획은 없나.
"2002년 이베이에 합류했을 때 딱 20년만 채우기로 결심했었다. 그 계획대로 은퇴한 것이다. 한 2~3년 정도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즐기는 시간을 가질 생각이다. 현재 코닛 외에 싱가포르 소셜 미디어 마케팅 업체와 쌍용C&B에서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