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상한 '비건'(Vegan) 화장품의 효과와 인증 기준이 모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행법상 비건 화장품 여부를 판단할 구체적인 기준이 부족한 데다 대다수 인증기관이 제조시설에 대한 실사가 아닌 서류만으로 심사하고 있어서다.
15일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전 세계 비건 화장품 시장 규모는 연평균 6.3%씩 성장해 오는 2024년에는 220억 달러(약 27조50억 원)를 넘어설 전망이다.
비건 화장품은 제조·가공 과정에서 ▲동물 실험을 하지 않고 ▲동물성 원료를 사용하지 않은 제품이다. 비건 열풍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건강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요구가 높아진 상황에서 나왔다.
이에 따라 패션·뷰티, 식음료 등 산업 전반에서 비건 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추세다.
아모레퍼시픽은 최근 비건 브랜드 '롱테이크'를 출시했다. 톱밥을 재가공하고 편백잎과 검정콩, 장미꽃 추출물 등 식물 유래 성분을 사용한 헤어 제품이다.
하반기에는 스킨케어 제품도 선보인다. 비건 브랜드인 '이너프 프로젝트'를 비롯해 일리윤, 마몽드, 한율 등의 스킨케어 제품도 한국비건인증원으로부터 비건 인증을 획득했다.
CJ올리브영은 이달부터 대대적인 '비건 뷰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주요 비건 화장품을 선별해 소개하고 최대 30% 할인가에 판매하는 행사다.
지난달에는 한국비건인증원과 영국 비건 소사이어티(Vegan soctiety), 프랑스 이브비건(EVE VEGAN) 등 유럽 심사 기관의 인증을 받은 제품을 모아 '올리브영 비건뷰티' 아이콘을 부착했다. 클리오, 디어달리아, 스킨푸드, 딘토 등이 포함됐다.
LG생활건강도 지난달 한국비건인증원에서 인증을 받은 '비욘드 엔젤 아쿠아' 스킨케어를 출시했다. 기존 제품에서 동물성 원료를 배제하고, 울릉도 농장에서 기른 전호(미나리과 풀) 추출물과 나무 수액 등을 사용했다.
더페이스샵도 최근 동물성 원료를 사용하지 않은 비건 토너와 크림 등을 선보였다.
◇현행법상 '비건' 판단할 명시적 기준 無...개별 기관이 인증
현재 국내 화장품법상 '비건 화장품'을 규정하는 필수 원재료나 함량 및 수치 등은 적혀있지 않다. 비건 화장품 여부를 판단하고 인증하는 권한은 '화장품 표시·광고를 위한 인증·보증기관의 신뢰성 인정에 관한 규정' 제2조에 따라 '국제적으로 통용되거나 신뢰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관'이 갖기 때문이다.
이 규정은 '비건'이라는 명칭으로 표시 및 광고할 수 있는 인증의 종류에 관한 항목이다. 해당 기관이 인증·보증한 제품에 한해 "할랄(Halal)·코셔(Kosher)·비건(Vegan) 및 천연·유기농 등"으로 표기할 수 있다는 법적 근거가 된다.
즉 ▲제조업체마다 다양한 '식물유래성분'을 사용하고 ▲국내외 기관의 자체 기준으로 심사 및 인증을 하는 것이지, 현행법이 비건 화장품 여부를 판단하는 구체적이고 통일된 기준이나 원료 및 명칭을 제시하지 않는다.
실례로, 국내의 한 화장품 원료 업체는 지난해 '식물성 콜라겐'이라는 용어가 소비자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잘못된 표현이라는 내용의 자료를 냈다. 콜라겐과 결합구조가 다른 당단백질(extensin)로, '식물 유래 유사콜라겐'으로 명칭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국내외 화장품성분등록이나 학술 논문에도 등재되지 않았지만, 시중에선 광고 문구로 여전히 쓰이고 있다.
◇효과 면에선 동물 성분도 우수..."식물성이 능사 아냐"
비건 화장품은 법령에 명시된 천연 화장품 및 유기농 화장품과 엄연히 다르다. '천연화장품 및 유기농화장품의 기준에 관한 규정' 제8조에 따르면, 천연 화장품은 화학적 합성 원료가 아닌 동식물 및 동식물 유래 원료로 제품(중량 기준)의 95% 이상을 구성한 것을 뜻한다. 유기농 화장품도 동식물성 원료를 포함해 유기농 원료를 10%이상 함유한 것이다.
천연 화장품과 유기농 화장품에 들어가는 대표적 동물성 성분은 동물의 지방에서 추출한 글리세린과 동물 피부 및 조직에서 추출한 콜라겐, 양털에서 추출하는 라놀린 오일과 상어 간유에서 추출한 스쿠알렌, 산양유 등에서 나오는 카제인 등이다. 보습 효과가 입증돼 립밤과 크림 등으로 주로 쓰인다.
이 때문에 효과에 대한 평가도 모호하다. 시중에 비건 화장품들은 '저자극' '피부 보호' 효과를 전면에 내걸고 있다. 반면 피부 보습 효과가 입증된 동물성 원료들은 비건 화장품에 쓰이지 않는다.
꿀벌이 만든 벌집 밀랍에서 추출한 비즈 왁스, 피부 노화를 막는 데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진 프로폴리스 역시 동물 유래 성분이다. 화장품의 기능적인 면을 고려하면, 동물성 원료를 무조건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얘기다.
소셜미디어(SNS)에는 비건 화장품의 효과가 '기대 이하'라는 후기도 잇따르고 있다.
30대 직장인 A씨는 "비건이 워낙 유행인 데다 '착한 화장품'이라는 문구를 보고 구매했다"며 "피부에 더 순하고 효과적이라는 광고를 믿었는데, 기대한 만큼의 보습 효과는 얻지 못해 원래 쓰던 (논비건)제품으로 바꿨다"고 했다.
40대 직장인 B씨도 "SNS에서 유명한 식물성 성분의 화장품을 사용한 뒤 피부가 다소 화끈거리고 불편했다"며 "비건이 모든 피부에 좋은 건 아닌 것 같다"고 적었다.
◇'착한 화장품' 인증 비용 및 갱신 시기도 제각각...대부분 서류 심사
인증에 드는 비용이나 갱신 시기도 기관마다 다르다. 일부 기관은 화장품 기업 매출에 따라 인증 비용을 책정한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비용을 다시 내고 주기적으로 갱신해야 한다. 이 비용은 약 45만~420만 원까지 제각각이다.
대다수는 생산 공장에 대한 실사 대신 서류 심사로 끝난다. 매번 서류 심사에 들이는 비용과 '비건 인증 마케팅' 비용은 결국 소비자 부담으로 이어진다.
국내 화장품 제조업체가 비건 인증을 위탁하는 심사 기관은 국내외로 나뉜다. 이브 비건(프랑스), 비건 소사이어티(영국), 브이라벨(이탈리아)이 대표적인 유럽 인증 기관이다.
국내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2020년 인증 기관으로 선정한 한국비건인증원이 있다. 공통적으로 동물실험 진행 여부과 동물유래성분 미포함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해외 기관들은 국내 대행사를 거쳐 심사 작업을 진행한다.
프랑스에 본사를 둔 이브 비건의 경우, 인증 심사를 신청할 때 최초 등록비용과 문서 심사비, 제품 분석 등 명목으로 약 220만 원이 든다. 품목당 10만원씩 추가되고, 18개월마다 갱신을 해야 한다.
이때 문서 심사비와 갱신 신청비 등으로 약 180만 원이 든다. 품목이 늘면 비용이 추가된다. 1개 제품당 최초 인증부터 1회 갱신까지 420만 원 정도가 드는 셈이다. 자사가 인증한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만 심사 대상으로 삼고, 최초 인증 시 공장 실사를 한다. 신규 제품 제조 시마다 추가로 실사를 하지는 않으나 18개월마다 주기적으로 공장 실사를 진행한다.
영국 비건소사이어티는 현장 실사 없이 서류 심사로만 진행한다. 서류상 문제가 있는 경우에 한해 추가 자료를 요청한다. 전년도 기업 매출에 따라 비용을 책정하며, 최소 100만 원 중반 수준이다. 대기업일 수록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유효기간은 12개월 또는 24개월이며, 기간이 늘면 갱신 비용도 오른다.
이탈리아 브이라벨 역시 국내 대행사를 통해 서류만 심사한다. 서류 대부분이 제조업체발(發) 자료이기 때문이다. 달바와 분코, 웨이크메이크 등이 브이라벨 인증을 획득한 브랜드다.
한국비건인증원의 경우, 해외 심사 기관보다 비용은 저렴하지만 유효기간이 12개월이다. 화장품 제조업체로부터 교차오염(논비건 제품에 의한 오염) 등을 입증하는 서류를 받기 때문에 실사는 생략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단체나 환경단체, 식약처로부터 원료 관련 문제를 지적 받는 등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서류 심사만 통과하면 된다.
화장품 업계 관계자는 "인증 유효 기간이 짧아 지속적으로 판매를 하려면 매번 인증 기관에 서류 심사 비용을 지불하고 연장해야 하는 구조"라며 가치에 기반한 소비 비용을 고객이 부담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대형 화장품 제조업체 관계자도 "전 세계적으로 '동물성 원재료' 자체를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급격히 퍼지면서 비건 시장이 급성장했다"면서도 "비건 화장품이 동물유래성분 화장품보다 효과적이라는 건 따져봐야 할 문제"라고 했다.
그는 이어 "보습 효과 등을 따지면 오히려 동물성 원료가 적합한 경우도 많다"며 "비건 화장품이라고 무조건 피부에 잘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비자가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