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2시 찾은 서울 장충동 신라면세점 지하 1층은 흡사 중국의 현지 시장을 방불케 했다. MLB, 에비수, 휠라 등 국내 의류 브랜드를 판매하는 매장 곳곳에 중국인들이 소셜미디어(SNS) 틱톡을 통해 개인방송에 한창이었다. '면세점 연말 창고정리, 후드티 할인 90% 부터'라고 A4용지에 중국어로 써 붙인 것이 눈에 띄었다.
호텔신라(008770)가 틱톡커(틱톡을 하는 사람)나 유튜버의 라이브방송을 위해 마련한 작은 공간에선 한 20대 중국인 여성이 에비수의 겨울용 패딩 10여개를 하나씩 시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사람은 3명. 이들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시청자의 댓글에 일일이 답변하며 구매를 독려했다. 방송화면을 보니 80명 가량의 시청자가 들어와 있었다.
같은날 명동 신세계(004170)면세점 MLB 매장 앞에서도 30대로 추정되는 남성이 중국어로 개인방송 중이었다. 남자는 스마트폰을 앞에 두고 시청자들의 질문에 답을 해줬고, 그 앞에서 한 사람이 시청자들이 원하는 후드티를 매장에서 바로 가져와 카메라에 보여줬다. 주변에서 중국인 스태프 4명이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시청자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이 개인방송팀을 이끄는 사람은 한국에 거주하는 40대 중국인 여성으로, 두달 전에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주로 20~40대 중국인들이 틱톡을 통해 제품을 구매한다"고 했다.
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한국 브랜드는 MLB, 아크메드라비(acme de la vie)이고, 중국 현지에도 매장이 있지만 본사가 있는 한국에서 직접 구매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는 설명했다. 한국에만 있는 디자인에 특히 열광한다고 한다.
이 방송을 보는 사람은 3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 여성은 "평일 낮 시간이다 보니 평소보다 시청자 수가 적은 편이고 이렇게 4시간 방송을 하면 300만~400만원 어치가 팔린다"고 했다.
그는 "주말에는 시청자 수가 확 올라가는데 같은 시간 방송을 해도 수천만원씩 판다"고 했다. 한 사람이 최소 10만원 이상은 쓴다는 거였다. MLB의 인기 후드티 하나 가격이 10만원을 넘기 때문이다.
이날 방문한 롯데·신세계·신라의 서울 시내면세점은 예상대로 한산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하늘길이 막히기 전까지 설화수, 후를 대량 구매해 중국 현지에 판매하는 보따리상(따이궁)과 왕홍(온라인 인플루언서), 단체관광객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던 명품, 고가 화장품 매장은 텅텅 비어있었다.
간혹 중국인 무리가 5만원짜리 현금다발을 들고 다니면서 중저가 화장품이나 건강기능식품을 무더기로 사가는 모습이 보였다.
고객이 워낙 없다보니 중국 틱톡커의 존재감은 컸다. 이들이 방송을 한다며 매장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고 주변 매장에 짐을 한가득 늘어놔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국내 면세점의 한 관계자는 "따이궁이나 왕홍에 비해 판매금액이 적긴 하지만 코로나19로 방문객이 워낙 없다보니 한 사람이 아쉽다"며 "이들에게 면세점이나 입점 브랜드 차원에서 지급하는 수수료는 따로 없고 제품 가격을 할인 받아 마진을 남기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 국내 면세점 매출 30%가 中 따이궁에게… "매출 기여도 큰데 어떻게 포기하나"
중국 따이궁도 여전히 면세점 매출 상당부분을 책임지는 판매 채널 중 하나다. 코로나19 이전에는 개인 판매자들이 각자 면세점을 돌아다니면서 재고 확보에 나섰다.
그러나 최근에는 재고가 가장 많은 롯데면세점에서 오픈런(면세점 개장 전에 대기했다가 문을 열자마자 매장으로 질주하는 것)을 해 설화수, 후 등 인기 제품을 구매한 뒤 다른 면세점으로 흩어진다.
이 때문에 따이궁은 오전 이른 시간에 주로 면세점을 활보하고, 낮 시간에는 틱톡커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지나친 중국 의존으로 인해 면세점의 수익성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롯데·신라·현대·신세계 등 면세 4사의 작년 3분기 매출액은 전 분기 대비 22% 증가한 3조724억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영업이익은 90.7% 줄어든 64억원에 그쳤다.
면세점이 따이궁을 모아오는 중국 여행사에 지급하는 알선수수료가 늘어난 영향이다. 각 사 매출에서 알선수수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코로나19 이전 20% 안팎에서 최근 30%까지 올라간 것으로 추정된다.
면세점이 따이궁에 의존하면 수익성이 악화될 뿐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국 면세 전문지 무디데이빗리포트에 따르면 샤넬, 에르메스와 함께 3대 명품 브랜드인 루이비통이 지난 1일 롯데면세점 제주점 매장 운영을 종료한 데 이어 남은 7개 시내면세점에서 철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희소성이 큰 가치를 갖는 명품 브랜드에게 '대량 구매'를 전문으로 하는 따이궁이 많은 한국 면세점은 매력적이지 않은 판매채널이 된 것이다.
면세점 업계도 이런 기형적인 수익 구조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지만 당장 중국 따이궁 만큼 매출에 도움이 되는 수익원을 찾기 어렵다는 현실론에 갇혀 있다.
국내 또 다른 면세점 관계자는 "중국인 큰손 1명이 구매하는 금액이 다른 나라 고객 10명분과 맞먹는데 어떻게 포기하겠나"라며 "코로나19 사태가 완화되면 중국 관광객 입국이 다시 늘어나고 면세점 실적도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자국 면세점 시장을 육성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냥 낙관하기는 어렵다. 중국 하이난 당국에 따르면 관내 10개 면세점의 지난해 매출은 602억위안(11조2845억원)으로 전년 대비 84% 늘었다. 하이난을 찾은 쇼핑객은 73% 늘어난 970만명에 달했다.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힌 상황에서 중국 정부가 2020년 7월 1인당 면세한도를 3만위안(562만원)에서 10만위안(1874만원)으로 대폭 늘렸고 전자제품, 와인 등으로 면세품목을 확대하는 등 적극 독려한 영향이다.
한국 정부도 면세점 업계의 위기감에 동감하며 과감한 규제 완화에 나서고 있다.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2022년 경제정책방향'에 따르면 내국인이 국내 면세점에서 소비할 수 있는 구매 상한액(5000달러)이 폐지된다. 상한액 폐지는 1979년 제도 도입 이후 43년 만이다.
지난 14일에는 임재현 관세청장이 면세업계와의 간담회에서 "국내를 방문하지 않은 해외 거주자에게 국산품을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두 사항 모두 면세업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김익성 동덕여대 교수(전 한국유통학회장)는 "관세청이 면세점 제품을 온라인으로 판매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줘야 할 뿐 아니라 자체적으로 완화할 수 있는 규제를 발굴해야 한다"며 "면세점 업계는 현재 많이 팔리는 화장품, 가방, 귀금속 이외로 상품 구색을 확대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