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손민균

2018년 나이키는 유명 광고문구 ‘Just Do It’(일단 해봐)의 30주년을 기념하는 광고의 메인 모델로 미식축구(NFL) 선수였던 콜린 캐퍼닉을 발탁했다.

캐퍼닉은 2016년 백인 경찰이 흑인 시민에 폭력을 행사한 것에 항의하는 의미로 경기 전 국가 연주 때 무릎을 꿇어 논란을 샀던 인물이다.

캐퍼닉의 행동은 미국 사회를 둘로 나눴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개인의 국가에 대한 의례를 강제할 수 없다는 ‘지지 세력’과 국민의례 불참은 반애국적인 행동이라는 ‘반대 세력’으로 나뉘었다. 이 일로 캐퍼닉은 소속팀에서 방출됐다.

캐퍼닉을 모델로 기용한 나이키의 선택은 논란을 재점화시켰다. 캐퍼닉의 흑백 사진에 ‘Believe in something. Even if it means sacrificing everything(신념을 가져라. 그 신념 때문에 모든 걸 잃을 지라도)’라는 문구를 실은 광고 사진에 캐퍼닉을 반대하던 세력은 나이키 신발을 불태우는 등 과격한 구매 거부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유명인들과 대중은 나이키를 지지하고 응원했다. 캐퍼닉의 유니폼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나이키의 도발적인 광고는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8년 나이키가 'Just Do It' 카피 30주년을 기념해 공개한 광고 이미지. 광고 속 인물은 NFL 경기 전 국민의례 시 무릎을 꿇는 행위로 인종차별 반대 의사를 피력해 리그에서 퇴출된 콜린 캐퍼닉. /나이키 제공

◇'#멸공’…정용진이 시작한 논쟁, ‘밈’이 되다

최근 정용진 신세계(004170) 부회장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게시물이 대통령 선거를 앞둔 대한민국의 이슈 중심에 섰다. 정 부회장은 작년 8월 ‘평화협정은 휴지됐다’는 제목의 신문 1면 사진과 함께 “평화협정은 원래 휴지다. 협정을 믿지말자”는 글을 올리며 뜨거운 감자가 됐다.

일회성으로 지나가나 싶던 정 부회장의 발언 논란은 이후 ‘공산당이 싫어요’로 이어졌다. 중국을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되면서, 신세계의 중국 관련 사업이 피해를 볼 것이란 우려가 쏟아졌다.

이에 정 부회장은 “나의 멸공은 중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나의 멸공은 오로지 우리 위에 사는 애들에 대한 멸공이다”라고 북한을 겨냥한 발언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의 ‘멸공’ 발언은 ‘#멸공’ 이라는 해시태그가 붙으며 ‘밈’(온라인에서 유행하는 놀이 문화)이 됐다. 인스타그램에는 ‘#멸공’이라는 해시태그가 붙은 게시물이 6000건 이상 올라왔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이마트(139480)에서 멸치와 콩을 샀다고 인증샷을 올렸다. 나경원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비슷한 사진을 올렸고, 윤 후보와 경쟁했던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멸치와 콩을 반찬으로 먹는 모습을 인증샷으로 남겼다.

네티즌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정 부회장의 팬과 보수 정당 지지층은 이마트와 스타벅스 인증샷을 공유하며 정 부회장에 대한 지지 의견을 피력했다. 반면, 진보 정당 지지 세력을 중심으로는 신세계 관련 상품을 불매하겠다는 ‘신세계 보이콧’ 선언이 나왔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 8일 이마트 이수점에서 장을 본 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렸다. 윤 후보는 여수멸치와 약콩 등을 샀고, 인스타그램에 '#멸치' '#콩'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인스타그램 캡처

◇“사회·정치적 의견 표명, 팬덤 형성 유리”…정치적 포석 해석도

불확실한 다수의 고객보다는 확실한 소수의 팬이 낫다. <팬덤경제학>의 저자 데이비드 미어언 스콧은 정 부회장의 언행 처럼 의식적으로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행위를 ‘패노크라시(fanocracy)’라고 정의하고, “패노크라시는 팬이 통치하는 문화로, 오늘날 급부상하고 있는 비즈니스 전략”이라고 말했다.

소셜미디어 관리 회사 스프라웃 소셜이 낸 보고서에 따르면 소비자의 67%는 사회적·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브랜드를 더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하는 소비자들의 외면을 피할 순 없지만, 강력한 팬덤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 부회장의 멸공 발언은 북한에 대한 퍼주기를 불공정하다고 보는 1020세대와 고령의 전후세대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논란이 일었지만, 결과론적으로 이마트와 신세계는 대중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며 브랜드 인지도를 높였다.

<포노 사피엔스> 저자인 최재붕 성균관대 서비스융합디자인학과 교수는 “멸공 발언으로 한국 사회의 민감한 이념 이슈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는데, MZ세대는 도덕적 잣대에 대한 기준이 높지만, 논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다”면서 “(이번 멸공 발언은)다소 거칠지만 팬 형성에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이었다”고 평가했다.

일각에서는 대선을 앞둔 시점의 정치적 포석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대선을 통해 보수 정부가 들어서면 정부와 기업 간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란 관측에서다. 만약 진보 정부가 정권을 잇는다 하더라도 신세계를 옥죄거나 새로운 유통 대기업 규제 정책이 나올 경우 ‘보복 프레임’을 씌울 수도 있다.

실제로 정 부회장의 멸공 발언 논란 이후 민주당 내에선 “앞으로 신세계백화점, 이마트 스타벅스는 가지 않을 생각”(진성준 의원) 등의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만일 정부가 이번 일로 신세계나 정 부회장에 대해 압력을 행사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게 된다”고 했다.

그는 “중국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개인이 ‘멸공’이라고 표현한 것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적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시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멸공' 발언 논란 이후 네티즌 사이에선 신세계 제품을 구매하겠다는 '바이콧'과 신세계 구매를 거부하는 '보이콧'으로 나뉘어 졌다.

◇사과하며 한발 뺀 정용진… “참모 조언·표현 절제 필요”

일반적으로 기업이나 기업인이 사회적 이슈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밝히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멸공 발언 논란에 이마트 노조 등 내부에서도 부정적 반응이 터져 나오자 정 부회장은 지난 13일 “저의 자유로 상처받은 분이 있다면 전적으로 저의 부족함 탓”이라고 한발 물러서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다만 해당 문장은 ‘상처받은 분이 있다면’이라는 ‘가정형’ 문장으로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진심어린 사과였다면 관련 게시물을 모두 삭제했을텐데, 기존 게시물을 그대로 남겨뒀다는 점도 진정성을 의심케 했다.

유통업계에는 신세계그룹 내 정 부회장의 입을 관리해 줄 참모가 사라졌다는 평가와 함께 언제 시한폭탄이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많다.

그동안 많은 신세계 임원들이 정 부회장에게 SNS 활동 자제를 요청했지만, 정 부회장은 ‘이건 내 사생활이고, 간섭하지 말라’는 식으로 선을 그은 것으로 알려졌다.

<스노우볼 팬더밍>의 저자인 박찬우 왓이즈넥스트 대표는 “정 부회장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일상을 공개하는 등 대중과 소통하며 일반적인 재벌과 행보를 달리 했다”며 “여기서 더 강력한 팬덤을 형성하려면 SNS를 통해 개인과 기업의 비전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브랜드에 대한 팬덤을 형성하려면 브랜드가 선망의 대상이 돼야 한다”면서 “과도한 논쟁을 일으키며 팬들과 어긋날 경우, 실이 클 수밖에 없다. 표현을 절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