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이마트 신촌점. 개점과 동시에 지하 2층 와인코너를 향한 '오픈런(개장과 동시에 질주하는 현상)'이 펼쳐졌다. 이마트가 선보인 스파클링 와인 '페리에 쥬에 벨에포크'를 사기 위한 질주였다. 당시 이마트는 대한항공 퍼스트 클래스 와인으로 유명한 시가 30만원짜리 페리에 쥬에 벨에포크를 18만원에 출시했다. 현지 판매가보다 3000원가량 저렴했다.
롯데마트에서는 올해 스파클링 와인 '모엣 샹동 임페리얼'이 매출 상위권에 들었다. 그룹 블랙핑크 소속 가수인 제니가 즐기는 와인으로 유명해진 모엣 샹동 임페리얼을 롯데마트에서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정보가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확산하면서다. 롯데마트는 면세점에서도 8만원은 줘야 살 수 있는 모엣 샹동 임페리얼을 7만원대에 할인 판매했다.
이마트(139480)와 롯데마트가 와인 구매 창구로 자리매김했다. 정용진 신세계(004170)그룹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각각 전자상거래 기업에 맞서 꺼낸 대형마트 와인 상품 강화 전략이 적중했다. 온라인 구매가 안 되는 와인을 고객들의 발길을 끌기 위한 미끼 상품으로 꺼냈지만, 좋은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내놓으면서 국내 와인 시장의 판도를 바꿔놨다는 분석이 나온다.
◇ 이마트 수입 노하우 된 정용진式 '바잉파워'
20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이마트는 전 세계 주요 와이너리(와인 양조장)의 큰손으로 통한다. 국내외 12개 이상 와인 수입사와 손잡고 들여올 와인을 사전 기획해 대규모 물량을 주문하는 식이다. 지난 5월 오픈런을 일으킨 페리에 쥬에 벨에포크도 현지 와이너리에서 가능한 수량 전체를 가져오는 방식을 택했다. 현지 판매가에 근거한 대규모 물량이 현지보다 싼 판매가를 만들었다.
2019년 8월 4900원에 출시한 와인 '도스코파스' 출시가 이마트의 와인 수입 노하우가 됐다. 도스코파스는 이마트가 창사 이후 첫 적자를 내면서 출시됐다. 이마트는 2019년 2분기 299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는데, 당시 정 부회장은 20년간 '왕좌'를 지켰던 유통공룡 이마트가 신흥 강자로 떠오른 전자상거래 기업 쿠팡 등 온라인 쇼핑에 무너진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정 부회장은 곧장 '바잉파워(구매력)'를 앞세운 초저가 전략을 꺼냈다. 그는 온라인 쇼핑에서는 살 수 없는 와인을 초저가 상품으로 내면 고객 유입을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정 부회장은 선물용으로 쓸 와인을 신세계백화점 바이어를 통해 수소문할 정도의 와인 애호가다. 2008년 국내로 들어오는 와인 가격이 너무 비싸다며 직접 와인 수입사를 차렸다.
이마트는 정 부회장의 초저가 전략에 맞춰 칠레 한 와이너리에 "한번에 100만병을 사겠다"고 제안, 단가를 확 떨어뜨렸다. 일반적인 와인 수입 규모의 300배를 넘어서는 물량이었던 덕에 판매 가격이 현지 판매가보다도 저렴해졌다. 이마트는 또 국내 주류법상 술은 유통업체 자체 브랜드(PB)로 만들 수 없다는 점을 고려 해외에서 출시하고 이를 수입하는 방식을 취했다.
명용진 이마트 와인담당 바이어는 "회사의 방침이 '가격에서 밀리면 답이 없다'였다"면서 "국내 출시되지 않은 와인 중 10달러 내외 와인을 모아 품질 검증을 거쳤다"고 했다. 그는 "이전까지 와인은 보통 3000~4000병을 수입해서 6개월 기간에 팔았다면 도스코파스는 100만병을 수입해 4개월 만에 팔았다. 와인을 들여오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변했다"고 덧붙였다.
이마트에 따르면 도스코파스 카베르네 소비뇽과 레드블렌드 2종은 2019년 8월 출시 이후 지난해 8월까지 1년 간 200만병 넘게 팔렸다. 이마트는 여기에 칠레산 화이트 와인 도스코파스 샤도네이, 품질을 개선한 8900원짜리 포르투갈 레드와인인 도스코파스 리제르바를 지난해 4월과 7월 각각 추가했다. 도스코파스 단일 브랜드로만 지난 11월까지 누적 420만병이 팔렸다.
◇ 신동빈, 계열사 물량 합치고 중저가 시장 잡는다
롯데마트도 바잉파워를 앞세워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와인 판매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스페인 와이너리 '비노스 보데가스'의 '레알 푸엔테' 와인 2종을 3900원에 내놨다. 초도 물량으로 40만병을 계약했다. 특히 레알 푸엔테가 수확이 빠른 포도 품종인 '템프라니요'를 사용하고, 숙성 기간이 짧다는 장점으로 출고가 자체가 낮아 이마트보다 1000원이나 가격이 싸졌다.
최근 롯데마트는 신동빈 회장 주도의 중저가 와인으로 발을 넓히고 있다. 지난해 11월 와인 사업을 핵심 성장동력으로 키우겠다고 밝힌 후 출시한 시그니처 와인 '트리벤토'가 신동빈 회장의 작품이다.
트리벤토는 칠레의 최상급 와이너리인 비냐 콘차이토로가 아르헨티나서 만든 말벡 100% 레드 와인이다. 신동빈 회장이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영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즐겼던 와인으로 직접 첫 번째 시그니처 와인으로 추천했다.
신 회장이 트리벤토를 시그니처 와인으로 추천하면서 롯데마트는 가격 절감에 사활을 걸었다. 단독 수입 판매가 아니라 롯데백화점, 롯데슈퍼, 세븐일레븐 등 롯데 유통 계열사와 물량을 통합했다. 단독 2만5000병가량 수입하던 물량을 30만병으로 늘리기로 하고 한병당 1만900원에 수입했다. 기존 판매가가 1만5000~1만8000원이었던 것과 비교해 최대 40% 내려갔다.
트리벤토 수입 경험을 바탕으로 롯데마트는 올해 와인 판매 상위권에 든 와인 대부분을 이 같은 방식으로 수입하고 있다. 계열사 물량 통합을 위해 롯데마트 내 와인 관련 별도 조직인 프로젝트W팀도 만들었다. 2019년 프랑스의 한 와이너리에서 와인 기사 작위를 수여받은 이영은 주류팀장을 비롯해 국제 인증 와인 전문가 자격증 취득한 팀원들이 프로젝트W에 모여 있다.
장세욱 롯데마트 주류팀 MD는 "고객들의 와인 수요를 고려해 어떤 상품을 들여올지 정한다"면서 "상품을 정한 이후엔 롯데 유통 계열사 전체가 공동으로 물량을 확정 가격을 조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롯데마트는 모엣 샹동 임페리얼과 같이 와인 소비자에게 인지도가 높은 와인을 현지 가격 수준으로 즐길 수 있게 하는 노하우를 어느 정도 정립했다"고 강조했다.
◇ 대형마트, 와인 중심 매장 개편…"다양성 해칠 우려도"
이마트가 국내 와인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매출 기준)은 약 15%에 달한다. 롯데마트 역시 10% 수준으로 올라섰다.
한국소비자원이 수입 와인 구매 경험이 있는 소비자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에 따르면 수입 와인의 주요 구매 장소는 대형마트가 72.8%로 가장 많았다. 수입 와인 가격은 3년 전보다 최대 35.5% 저렴해진 것으로 집계됐다.
대형마트가 해외 와인 제조자와 직접 협상을 하는 터라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는 가격이 가능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도스코파스 420만병 판매는 없었던 숫자"라고 말했다.
이철형 와인나라 대표는 "2019년 4900원 도스코파스, 2020년 3900원 레알 푸엔테는 소비자들이 마트를 찾게 만들었고, '홈술' '혼술' 등으로 이제는 와인이 완연한 시장 확장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와인 수입 금액은 3억3000만 달러(약 39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27% 늘었다. 올해는 지난 8월까지 지난해 전체 기록을 넘어섰다.
다만 일각에선 이마트와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중심의 와인 시장이 다양성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새로운 와인을 수입·판매하기보다는 중소 와인 전문기업들이 발굴한 와인 판권을 사들이거나 재계약 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 대표는 "대형마트는 발굴 대신 잘 되는 와인을 싸게 들여오고 있다"면서 "와인의 다양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