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 아직 안 죽었네."

지난 25일 롯데그룹과 LG(003550)그룹이 일제히 정기 임원 인사를 발표하자 유통업계에선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1837년 설립된 P&G는 다우니(섬유유연제), 오랄비(칫솔), 페브리즈(방향제), 펨퍼스(기저귀) 등 우리 생활에 친숙한 브랜드로 잘 알려진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다.

2000년대 말 삼성, LG 등 대기업이 앞다퉈 P&G 출신 마케팅 전문가를 임원으로 모셔갔던 현상이 최근 다시 재현되고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시장 상황이 급변하면서 제품력 만큼 마케팅이 중요한 차별화 요소가 되고 있어서다. 184년 간 각종 생필품을 히트시킨 P&G의 마케팅 능력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김상현 롯데그룹 유통 총괄대표(부회장). / 롯데그룹 제공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유통 사령탑인 롯데쇼핑(023530) 총괄대표에 P&G에서 거의 30년을 근무한 김상현 전 홈플러스 부회장을 영입했다. 이 자리에 외부 인사가 오른 건 창립 이래 처음이다. 신 회장은 "변화와 혁신을 주도할 초(超)핵심 인재를 확보하라"로 주문한 뒤 유통 명가 롯데를 재건할 인물을 심사숙고한 끝에 김 총괄대표를 영입했다.

김 총괄대표는 P&G 역사상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아시아계 인물이다. 1986년 미국 P&G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2003~2008년 한국 P&G 대표이사, 2008~2014년 P&G 아세안 총괄사장, 2014~2015년 P&G 본사 신규시장 부문 부사장을 지냈다. 가는 자리마다 탁월한 마케팅 능력을 바탕으로 역대 최대 매출을 내며 승승장구했다. 한국 P&G 대표일 때는 한국이 P&G의 전자상거래와 디지털 마케팅을 주도하는 핵심 거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했다.

내년에 취임 5년차인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단행한 인사에서도 P&G 출신들이 약진했다. LG전자(066570)는 P&G에서 브랜드마케팅 분야 전문가로 근무한 김효은 상무를 글로벌마케팅센터 산하 브랜드 매니지먼트 담당으로 영입했다. 내년 3월까지가 임기였던 차석용 LG생활건강(051900) 부회장은 유임됐다. 2005년 고(故) 구본무 회장이 스카우트해 입사한 차 부회장은 LG그룹의 최장수 전문경영인이다.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 LG생활건강 제공

1953년생인 차 부회장은 LG그룹 전문경영인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편이어서 일각에선 용퇴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구 회장은 부친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고 LG생활건강의 매출을 매년 역대 최대로 끌어올린 공을 인정해 연임을 결정했다. 차 부회장은 1985년 미국 P&G에 입사한 뒤 1999년 한국 P&G 사장에 올랐다. 2001년 법정관리중이었던 해태제과 대표로 영입돼 3년 만에 회사를 흑자로 만들었다.

P&G는 신입사원을 글로벌 리더로 만든다는 원칙으로 직급에 상관없이 자기 책임 하에서 특정 브랜드의 마케팅 전 과정을 수행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신입사원 대다수를 인턴십으로 선발하며 출근 첫날부터 프로젝트 리더를 시킨다. 직급이나 연령에 관계없이 본인의 능력에 따라 해외 지사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특징이다. 한국 P&G에 근무하는 매니저급 직원 약 30%는 해외근무 경험을 가지고 있다.

P&G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인재사관학교로 유명하다. 세계적인 제조업체 제너럴일렉트릭(GE)의 최연소 최고경영자인 잭 웰치가 대표적인 P&G 출신이다. AOL(아메리카온라인)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케이스, 맥 휘트먼 이베이, 휴렛패커드(HP) 엔터프라이즈 전 CEO, 짐 맥너니 보잉 전 회장, 패트리스 루비트 폴로랄프로렌 CEO, 매트 퍼롱 게임스탑 CEO도 P&G에서 경험을 쌓았다.

국내에선 지난 2011년 삼성전자(005930) 최초의 여성 부사장에 오른 심수옥 성균관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가 P&G 에서 17년 간 근무한 뒤 2006년 삼성에 입사했다. 여성 생리대 시장을 장악한 위스퍼, 1년 만에 매출이 3배로 늘어난 팬틴 샴푸, 출시 6개월 만에 시장점유율 2위를 기록했던 비달사순 샴푸 등 숱한 히트작을 만들었다. 지난 9월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이사에 오른 손은경 전 CJ제일제당(097950) 마케팅 담당 부사장도 P&G코리아 출신이다. 그는 GS칼텍스 첫 30대 여성 임원에 오른 뒤 2018년 CJ 내 첫 여성 부사장으로 승승장구했다.

유통업계 현직 CEO·임원으로는 황진선 풀무원생활건강 대표, 작년 할리스에프엔비 대표를 지냈던 신유정 에이블씨엔씨(078520) 상무, 이윤정 르크루제코리아 대표가 있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외 기업 간 제품 기술력 격차가 갈수록 줄어드는 만큼 디자인이나 마케팅에서 차별화 요소를 찾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며 "전세계에서 사랑 받는 브랜드를 대거 보유한 P&G는 좋은 마케팅 교본인 셈"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