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등의결권으로 인해 이사회의 독립성이 떨어지고 경영진의 독단적 경영을 견제할 수단이 없어 일반 주주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이해관계자를 고려하지 않은 정책을 펼 잠재적인 위험이 상존한다.”

국내 의결권 자문사 서스틴베스트는 지난 4일 쿠팡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 보고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차등의결권이란 1주(株)에 1주 이상 혹은 이하의 의결권을 주는 제도다. 국내에는 1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제도는 있지만 1주 이상의 의결권은 허용돼 있지 않다.

그러나 쿠팡은 지난 3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하면서 김범석 창업주에게 1주에 29표의 강력한 차등의결권을 부여했다. 김 창업주는 쿠팡 한국 법인을 100% 지배하는 미국 법인 지분을 10.2% 보유한 3대 주주이면서 의결권은 76.7%에 달한다.

김 창업주의 의견에 따라 회사의 주요 의사결정이 좌지우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김 창업주가 지난 6월 쿠팡의 한국 법인 이사회 의장직을 내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여전히 그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다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그래픽=정다운

◇ 김범석의 1주=29표…”황제 경영” vs “미국은 주주권 더 강력”

김 창업주가 의결권 76.7%를 보유한 쿠팡 미국 법인은 쿠팡 한국 법인을 통해 물류사업을 담당하는 쿠팡풀필먼트서비스(CFS)를 비롯해 쿠팡페이, 쿠팡이츠서비스,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 CPLP 등 자회사를 지배한다. 김 창업주는 국내에서 대부분의 매출을 내는 쿠팡의 주요 의사결정에 개입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아무런 직위나 직책을 맡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각종 법적 책임에서는 벗어난다.

대부분 회사 관계자로 구성된 한국 이사회가 김 창업주를 제대로 견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재 쿠팡 사내이사는 박대준, 강한승 공동대표와 윤혜영 리테일부문 총괄 부사장, 유인종 안전관리 부사장, 전준희 개발총괄 부사장이 맡고 있다. 사외이사와 감사위원은 이재붕 전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장과 김원준 전 공정거래위원회 경쟁정책국장이다. 윤혜영 부사장은 감사위원도 겸직하고 있다.

서스틴베스트는 보고서에서 경기도 이천 덕평물류센터 화재 사건을 사례로 들며 쿠팡의 지배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덕평 화재사고는 재무적 손실 뿐 아니라 사회적 평판 하락으로 손실이 크고 영업 정상화에 많은 시간에 소요됐기 때문에 이사회가 경영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러한 기능이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쿠팡의 수도권 물류 거점인 덕평 물류센터에선 지난 6월 17일 화재가 발생해 129시간여 만인 22일 완전 진화됐다. 이 물류센터는 지상 4층, 지하 2층 구조로 연면적이 축구장 15개 넓이와 맞먹는 12만7178.58㎡에 달한다. 이번 화재로 물류센터가 전소돼 수천억원대 재산 피해가 예상되고 있으며 화재 진압을 위해 현장에 들어간 김동식 경기 광주소방서 119 구조대 구조대상이 숨졌다.

사고 이후 쿠팡은 강한승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을 발표했고 김동식 구조대장 유족과 피해를 입은 덕평 주민들에 대한 보상대책을 발빠르게 마련했다. 그러나 부정 여론이 가라앉지 않으며 불매운동으로 이어져, 쿠팡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던 홍보 담당 임원이 사의를 밝히는 등 회사 경영에 적지 않은 충격이 있었다. 이 모든 과정에 김 창업주는 없었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 ISS 출신의 코즈마스 파파도풀리스는 미국 하버드 로스쿨 기업 지배구조 포럼에 지난 2019년 기고한 글에서 차등의결권을 도입한 기업에 독립적인 이사회 리더십이 부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미국 증시 시가총액 상위 3000개 기업을 묶은 러셀3000지수 기업을 분석한 결과 차등의결권을 도입한 기업 52%는 독립적인 이사회 의장이나 선임 사외이사가 없었다. 이 비율이 차등의결권이 없는 기업은 12%에 불과했다.

파파도풀리스는 “독립적인 이사회 리더십의 부재는 차등의결권을 가진 기업이 경쟁사에 비해 뒤처지는 여러가지 지배구조 관련 요인 중 하나에 불과하다”며 “차등의결권 도입 기업은 이해충돌 소지가 있는 최고경영자(CEO)와 관련된 특수관계자 거래를 할 가능성이 높고, 이사진 평가 과정을 공개할 가능성이 낮으며, 이사들이 회의에 불참할 가능성도 높았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국보다 상장사를 대상으로 한 공시 의무가 엄격하고 강력한 주주 권한을 인정하는 미국에서 경영진이 의결권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독단적 경영을 할거라고 보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한국은 총발행주식수 0.01%를 반년간 가지고 있어야 주주대표소송을 할 수 있지만 미국은 최소 주식 규모 제한이 없어 매년 수백건의 소송이 벌어지고 있다.

이수원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책임투자팀장은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주주의 대표소송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에 투자회사와 관련한 문제가 생겼을 때 사후 구제가 힘들지만 미국은 다르다”며 “우리나라에서 이야기하는 차등의결권 반대 논리를 쿠팡에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최수정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3월 연세대학교 법학연구원에 기고한 논문에서 “기업공개나 주식상장시기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새로운 산업에 진입하려는 경우, 자본·자산 규모가 크지 않은 기업 등은 차등의결권 주식 구조가 효과적이며 이익 실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단기적 손실을 감수한 적극적 투자와 장기적 이윤 추구, 유망산업 진입에 따른 회사의 성장성 기대 등은 주주 중심의 운영보다 창업주의 명확한 기업 성장 방향 제시에 따른 운영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스틴베스트의 ESG 보고서와 관련, 쿠팡은 분석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 상당수가 허위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며 반발했다. 회사 측은 “최근 혁신기업이 성장하는 데 (차등의결권이)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 안정적인 경영 성과 개선을 위해 도입해야 한다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발표 등 여러 긍정적인 측면은 고려하지 않고 일방향적인 의견만 제시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 김범석, ‘외국 국적’ 이유로 동일인 지정 피해…공정위 “제도 개선”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4월 쿠팡을 자산 5조원 이상인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으로 지정하면서 동일인은 쿠팡㈜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동일인은 ‘기업을 사실상 지배하는 자’로 공정위가 지분율과 임원 선임 영향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판단한다. 동일인으로 지정되면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은 특수관계인으로 묶여 지분 공시 등 의무가 생긴다.

공정위는 김 창업주가 쿠팡을 사실상 지배하는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그럼에도 △현행 공정거래법이 내국인을 대상으로 설계돼 외국인을 규제하기 어려운 점 △그동안 외국계 기업(에쓰오일, 한국GM 등)의 국내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해온 관례가 있고 △현 시점에서 김 의장과 그의 친인척이 보유한 계열회사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현재 위법행위를 하지 않고 있고, 앞으로 한다고 해도 처벌할 방법이 없다’는 이유로 김 창업주를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않은 것이다. 앞서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한 에쓰오일의 경우 모회사가 아람코이고 아람코의 최대주주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어서 개인을 특정하기가 어렵지만, 쿠팡은 그런 사례와는 다르다. 3%대 지분율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며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를 총수로 지정한 네이버와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논란이 확산되자 공정위는 동일인 지정 제도 전반을 손보겠다고 밝혔다. 김재신 공정위 부위원장은 4월 30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김범석 의장(당시 직책)이 (쿠팡을) 지배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며 “총수 2세들 중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동일인의 지정기준과 요건, 절차, 외국인을 지정할 때 보완책은 없는지 제도개선 방안을 즉시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창업주의 동일인 지정 가능성에 대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