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비행 때는 가장 늦게 내린 바람에 세관 신고 차례를 기다리는 데만 1시간 이상 걸렸다. 면세점 인도장에서 기입해준 구매 금액이 과세 대상 금액과 달라 영수증과 구매 내역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대조하느라 자진신고에도 10여분이 소요돼, 이번에는 앞 좌석을 예약하고 서둘러 입국심사를 받았다”

지난 19일 오후 2시 50분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무착륙 국제 관광 비행편에서 내린 승객들이 줄달음질을 쳤다. 대부분 양손에 면세점 쇼핑백을 든 채였다. 공항 세관을 조금이라도 먼저 통과하기 위해 면세한도(600달러)를 초과한 탑승객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긴 것이다.

친구와 함께 무착륙 관광 비행편을 이용한 30대 승객은 “온라인면세점에서 미리 화장품과 가방 등을 구입했다”면서 “세관 신고 절차가 번거롭다고 들어 관세 면제 한도 안에서 쇼핑했다”고 말했다.

공항에서는 번거로운 세관 신고 절차에 불만을 제기하는 승객들도 있었다. 인천공항 면세품 인도장에서 한 중년 남성은 본인의 ‘면세품 구매내역 확인서’에 구입한 모든 물품과 가격이 기록되자 “아내와 나눠서 관세 면제 한도를 적용받으려고 했는데, 내가 세금을 다 내라는 것이냐”면서 “미리 안내를 제대로 해주지 않았으니 구입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한 면세업계 관계자는 “항공료가 100달러(10만원대)인데 면세한도가 600달러에 불과해, 비용이나 세금 부담 등을 고려하면 면세점에서 구매하는 금액이 커지기 어렵다”고 했다.

2021년 6월 현재 인천국제공항은 제1터미널에 무착륙 관광 비행 탑승객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구분해 놓았다. /유한빛 기자
롯데면세점과 신라면세점이 철수한 자리에 새로 들어서는 신세계백화점과 현대백화점면세점. /유한빛 기자
매장 이전과 새단장 등이 진행 중인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면세구역. /유한빛 기자
무착륙 관광 비행편에 탑승하는 승객들이 면세점 쇼핑백을 들고 매장을 돌아보는 모습. /유한빛 기자
무착륙 관광 비행편이 출발하는 날에도 한산한 인천국제공항 면세점 화장품 매장. /유한빛 기자

◇ ’600달러'에 걸린 무착륙 관광 비행객 구매액, 면세업계 연매출 0.1% 그쳐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경영난을 겪는 항공사와 면세업계를 지원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도입한 무착륙 국제 관광 비행 제도가 시행된지 6개월. 관세청에 따르면 2020년 12월~2021년 5월 누적 탑승객은 1만5983명이다. 면세품 구매액은 228억원이다.

이에 대해 관세청은 “(무착륙 관광 비행이) 코로나19로 위축된 항공·면세업계의 위기 극복을 견인하고 있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현행상으로는 실적에 큰 보탬은 안된다는 게 항공사와 면세업계의 공통적인 평가다.

2021년 6월 19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하는 무착륙 관광 비행편에 탑승하는 승객들. /유한빛 기자
무착륙 관광 비행 탑승객이 작성해야 하는 신고서. /유한빛 기자
무착륙 관광 비행 탑승객은 이용할 수 있는 공항 시설이 한정돼 있다. /유한빛 기자
무착륙 관광 비행 탑승객 전용 입국 심사장. /유한빛 기자
무착륙 관광비행 탑승객은 전용 출구를 통해 세관을 지나야 한다. /유한빛 기자
무착륙 관광 비행 탑승객은 전용 출구를 통해 세관 신고를 진행해야 한다. 대기 중인 탑승객들의 모습. /유한빛 기자

한국면세점협회에 따르면 2019년 국내 면세업계의 매출액은 약 24조8590억원이다. 코로나 사태로 타격을 입은 지난해도 전체 매출 규모는 15조5052억원 정도다. 무착륙 관광 비행객이 6개월 동안 구입한 금액은 면세업계 연매출의 0.1%에 불과한 셈이다.

내국인이 면세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한도는 5000달러(약 568만원)지만, 600달러(약 75만원)를 초과하는 구매품에는 20~32% 세율로 관세가 부과된다. 관세청이 고가품으로 분류한 품목에는 개별소비세까지 부과돼 세금 부담이 커진다. 185만2000원이 넘는 시계와 가방, 463만원이 넘는 보석·장신구는 초과액의 50%를 관세로 내야 한다. 무착륙 관광 비행편의 탑승객이라도 무관세 한도를 크게 넘기기에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국내 한 항공사 관계자는 “방역지침상 전체 좌석 수의 60% 정도만 판매하고, 항공료는 비행시간이 비슷한 중국·일본 노선의 절반 수준인 10만원선에 불과해 매출 규모가 크지는 않다”면서 “항공승무원들의 필수 비행시간 등을 채우고 항공기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이민경,정다운

면세업계가 무착륙 관광 비행에 거는 기대감도 줄어든 상태다. 국내 대기업 계열 면세점 관계자는 “코로나 상황에서 처음 시행한 제도이다 보니 과세대상 금액을 산정할 때 할인율이나 적립금 등을 어떻게 계산할지를 두고 현장에서 혼선이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온다”면서 ”최근에는 백신 여권이나 트래블 버블(여행안전권역)에 대한 논의가 나오면서 해외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상황이라, 무착륙 관광 비행에 대한 관심은 줄어드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 美·유럽 면세점은 사업다각화…전문가 “포스트 코로나 격변기, 정부 규제 줄여야”

전문가들은 면세사업을 국내 관광산업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수출 산업’으로 보고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해외 면세업체들은 이미 세계화와 사업다각화에 뛰어들었다. 미국 DFS그룹은 중국 정부가 집중 육성하는 하이난 면세시장을 잡기 위해 지난 5월 선전면세그룹과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의류·화장품·보석·시계 등 제품을 둘러볼 수 있는 체험형 매장도 열었다.

중국 면세점의 부상 이전까지 매출 기준 세계 1위였던 스위스 면세업체 듀프리의 경쟁력 중 하나도 시장다변화다. 유럽 뿐만 아니라 중동·아프리카와 북남미의 공항·항구 430여곳에 2300개 매장을 두고 있다. 듀프리는 지난 2008년 중국에도 일찌감치 진출해, 상하이 훙차오공항과 청두공항에 매장을 운영 중이다.

해외에서는 공항들도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형 면세사업자들과 손을 잡고 있다. 면세점과 식음료(F&B)업장을 공항 이용객의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기반시설(인프라스트럭처)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픽=이민경, 정다운

이용객 수 기준으로 인천국제공항에 이어 세계 15위인 독일 프랑크푸르트국제공항은 명품 브랜드 매장을 2019년을 기점으로 대폭 늘렸다. 생로랑과 구찌 매장을 새로 열고, 에르메스 매장은 규모를 2배로 키웠다. 모두 비(非)유럽 지역으로 향하는 항공편이 뜨는 면세구역에 배치됐다. 이들 매장은 프랑크푸르트공항유통(FAR)이 운영하는데, 프랑크푸르트공항공사(Fraport)와 세계 10위권인 독일 면세업체 하이네만(Gebr Heinemann)이 합작해 설립한 법인이다.

이 같은 입점 브랜드 확장 전략에 대해 디어크 뫼르헨 FAR 운영총괄은 공항 전문매체 에어포트월드와 한 인터뷰에서 “새로운 매장은 이용객들에게 최상의 쇼핑 경험을 제공한다”면서 “프랑크푸르트공항은 명품 브랜드를 좋아하는 소비자들에게 한층 더 매력적인 공항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면세업계도 해외 진출을 가속화 하고 있다. 롯데는 지난 2013년 미국 괌공항에 첫 해외점을 연 이후 일본과 베트남,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에 면세점을 냈다. 신라도 2013년 싱가포르 창이공항점 단일 브랜드 매장 운영부터 시작해, 태국, 홍콩, 마카오공항에 점포를 열었다.

그러나 이는 1·2위인 롯데와 신라에만 국한돼 있다. 면세업계 전반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또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산업 전반이 재편되는 상황에서 면세사업자들이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고 국내외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한재필 숭실대 국제무역학과 교수는 “면세점 특허권에 기한을 둔 현행 제도는 특허권 갱신 부담 때문에 면세사업자들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하고 사업을 확장하기에 부담이 된다”면서 “면세산업은 수출업이라는 시각으로 면세사업자들이 해외 법인을 통해 직구와 역직구 등 신사업을 통해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지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비대면과 세계화의 중요성이 커지고 전 세계에서 경쟁자가 등장할텐데, 규제만 해서는 국가 경제에 도움이 안 될 것”이라면서 “중소기업과 대기업 면세점은 취급하는 품목이 다르기 때문에 관련 규제를 완화하면 대기업에만 혜택이 돌아갈 것이란 우려는 기우라고 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