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창업주인 김범석 이사회 의장은 앞으로 친인척 회사에 일감을 몰아줘도 제재를 받지 않는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그가 미국 국적자란 이유로 기업을 사실상 지배하는 동일인(총수)으로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정위가 국내 기업을 역차별 한다는 논란과 함께 예비 창업자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글로벌 기업인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부회장과 네이버(NAVER(035420))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는 한국인이란 이유로 배우자와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과의 거래 내역까지 공시해야 하지만, 김 의장은 매출을 한국에서 내는 회사 의결권 76.7%를 소유하고도 미국인이어서 친인척 거래 공시 의무에서 벗어났다.

쿠팡 주요 주주 및 지배구조 현황. / 그래픽=정다운

29일 공정위는 쿠팡 자산이 작년 3조1000억원에서 올해 5조8000억원으로 증가해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으로 지정하고, 동일인은 쿠팡㈜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동일인은 '기업을 사실상 지배하는 자'로 공정위가 지분율과 임원 선임 영향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판단한다.

공정위는 김 의장이 쿠팡을 사실상 지배하는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그럼에도 △현행 공정거래법이 내국인을 대상으로 설계돼 외국인을 규제하기 어려운 점 △그동안 외국계 기업(에쓰오일, 한국GM 등)의 국내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해온 관례가 있고 △현 시점에서 김 의장과 그의 친인척이 보유한 계열회사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김재신 공정위 부위원장은 "김 의장과 친족이 현재 보유한 국내 회사가 전혀 없는 것으로 파악했다"며 "쿠팡은 미국 거래소 규제를 받는데 친족과 임원, 주요 주주와 일정규모 이상 거래를 하게 되면 공시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 (국내에서도) 포착할 수 있다. 김 의장이나 친족이 회사를 새로 설립해 일감을 거래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정위가 김 의장의 지배력을 인정하면서도 동일인 지정을 하지 않은 건 직무유기라고 반발했다. 지금 개인회사가 없다고 앞으로도 없을거란 낙관론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린데다 앞서 3%대 지분율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며 총수로 지정한 네이버 등 다른 기업과의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김 의장의 쿠팡 지분율은 10.2%, 의결권 행사 비중은 76.7%에 달한다.

김 의장은 쿠팡이 추진하는 각종 사업은 물론 임원 인사, 인수합병(M&A) 등에 관한 의사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쿠팡도 미국 상장신고서에서 "쿠팡의 B클래스 소유주이며 창업주이자 최고경영자(CEO)인 김범석은 이번 기업공개(IPO) 이후 76.7%의 의결권을 보유할 것이고 이사 선임을 포함해 주주들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들의 결과를 통제할 능력을 갖게 된다"라고 밝힌 바 있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국장은 "공정위가 경제 검찰로서 사익 편취 행위를 감시하지 않겠다는 직무유기성 결정"이라며 "(롯데) 신동빈 회장이 일본 국적을 받아오면 공정위가 어떻게 할 건지 의문이다. 누가 봐도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동일인인 김 의장이 향후 사익 편취하면 제재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경제개혁연구소 출신 채이배 전 민생당 의원은 "김 의장이 해외에 개인회사를 만들어 일감을 몰아주고 돈을 받아도 (국내에서) 문제를 제기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지우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간사도 "이해진 네이버 GIO를 낮은 지분율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며 총수로 지정해놓고 김 의장만 제외하는 건 특혜"라고 말했다.

공정위가 "쿠팡이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 돼 미국 규제기관의 철저한 감독을 받고 있으므로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않더라도 국내에서 모니터링이 가능하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안일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미국 상장사 지분을 보유한 대표 및 임원, 10% 이상 보유 주주와 그 가족들에 대해 주식 보유 내역 및 회사와의 거래 내역을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여기서 가족 범위가 명확하게 명시돼 있지 않아 아마존 등 주요 기업들은 배우자에 한해 공시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배우자는 물론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과의 거래 내역을 공시해야 한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쿠팡처럼 미국 국적자가 일본 등 해외 자금을 유치해 국내에서 사업하는 회사들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데 공정위가 그런 기업에 대한 감시 감독 의무를 방기했다"며 "삼성, 현대차그룹 같은 대기업들은 총수를 지정해놓고 각종 규제를 적용해 팔다리를 묶어두는데 심각한 역차별"이라고 말했다.

쿠팡은 공정위의 이번 결정에 대해 "존중하며 앞으로도 공정거래법을 철저히 준수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