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폐허./책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의 기원과 경과, 전쟁 이후 영향을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한 책이 나왔다.

현대사 전문가인 리처드 오버리 영국 엑스터대 교수는 신간 ‘피와 폐허’에서 2차 세계대전이 ‘최후의 제국주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역사서가 2차대전의 시작을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서 두는 것에 비해 오버리 교수는 그 시작을 1931년 만주사변에서 찾는다. 통상 2차 세계대전의 개전일은 나치 독일이 인접국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1일로 알려져 있다. 이는 2차대전 참전국들의 표준 역사관과 공식 전쟁사에 부합하는 서술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1931년은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이 만철의 철도 노선을 고의로 폭파함으로써 ‘만주사변’을 일으킨 해다. 그는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1930년대 독일의 재무장과 제국 프로젝트 등을 조명한 후에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다룬다. 이는 2차대전이 유럽 국가들 간의 갈등에서 비롯됐다는 종래의 통설에서 벗어나는 견해다. 저자는 전쟁 기간을 1931~1945년으로 넓혀서 이 분쟁을 ‘장기 2차대전’으로서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도를 펼친다.

기존 2차대전 전쟁사는 이 분쟁을 강대국 간의 충돌로 규정하고 그 기원을 분석한다. 전간기의 군비 경쟁, 외교 위기, 이데올로기 갈등 같은 요인들을 강조한다. 반면 오버리 교수는 장기 2차대전을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기성 제국들과 1930년대에 새로운 영토제국주의의 물결을 일으킨 일본·독일 등 신흥국들 간의 충돌로 규정한다.

오버리 교수는 추축국을 결성하게 되는 독일·이탈리아·일본의 공통점은 ‘제국에의 의지’를 품었다는 데 있다고 보고 있다. 저자는 “2차대전은 세계 도처에 영토를 보유한 채 전 지구적 제국 질서를 구축해둔 기존의 영토제국들과 그 제국 질서에 반발해 국외 영토를 정복함으로써 새로이 영토제국이 되려는 신흥국들 간의 충돌이었다”고 해석한다.

저자는 제국적 관점에서 엄청난 규모의 전투는 어떻게 수행됐고 물자와 비용은 어떻게 조달됐는지, 전쟁의 도덕적 정당화 논거는 무엇인지 등의 물음에 답한다. 이어 군인만이 아니라 민간인들도 겪어야 했던 혹독한 대가와 심리적 영향, 유달리 심각했던 범죄와 잔혹행위, 나아가 1945년 이후에도 한참 동안 이어진 전쟁의 여파를 설명한다.

오버리 교수는 2차대전의 최종 결과로 500년에 걸친 식민주의가 막을 내리고 민족주의가 공고해졌다고 보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식민 통치의 잔재는 1945년 이후 두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새로운 세계질서의 형성을 좌우하는 가운데 급속히 무너졌다”고 책에서 밝힌다.

피와 폐허는 2차대전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지난 2022년 군사사 웰링턴 공작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리처드 오버리 지음 |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1권 724쪽·2권 750쪽ㅣ3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