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직장인 김정민(가명·37)씨는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어머니 명의의 실손보험이 없는 상황이라 의료비 부담은 정민씨의 몫이 됐다. 하지만 당장 모아둔 돈이 없는 데다 빚을 내자니 기존 대출이 있어서 추가로 대출마저 어려웠다. 이런 찰나에 정민씨는 퇴직연금에서 의료비를 중도에 찾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료비를 어떻게, 얼마나 퇴직연금에서 중도인출할 수 있는 것일까.

본인이나 가족의 갑작스러운 질병·상해로 목돈이 필요한 경우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실손보험에 가입돼 있거나 개별적으로 의료비 통장을 만들어서 치료비를 감당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큰 금액의 의료비를 당장 마련하기 쉽지 않다. 이러한 경우라면 퇴직연금에서 중도에 의료비를 인출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의료비 목적의 장기요양 사유로 퇴직연금을 중도인출한 규모는 2019년 1조원을 웃돌았으나, 코로나19 발생 이후 점차 줄어들다 최근 들어 다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장기요양을 사유로 퇴직연금을 중도인출한 규모는 2020년 8572억원, 2021년 786억원, 2022년 772억원을 기록한 뒤 지난해 상반기 552억원으로 다시 늘고 있다.

◇ 의료비 중도인출 가능한 퇴직연금 따로 있어

법적으로 의료비는 퇴직연금 중도인출 사유에 포함된다. 그러나 모든 의료비를 퇴직연금에서 중도인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나 배우자, 부양가족에 해당하는 사람이 6개월 이상 요양을 필요로 하는 질병이나 부상을 겪을 경우에 중도인출이 가능하다. 6개월 이상의 치료 기간 및 병명이 기재된 의사 진단서(소견서)나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급한 장기요양확인서를 제출하면 된다.

그래픽=손민균

주의해야 할 점은 퇴직연금 가입자가 가입한 상품 유형에 따라 의료비 중도인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확정기여형(DC형), 개인형(IRP형) 퇴직연금에 가입한 경우 의료비 중도인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확정급여형(DB형)의 경우 의료비 중도인출을 할 수 없다. 한 은행 프라이빗뱅커(PB)는 “중도인출은 개인별로 구분해서 자산을 관리하는 퇴직연금 제도만 가능하다”라며 “DB형에서는 의료비 중도인출을 할 수 없는데, 만약 회사에서 퇴직연금 제도를 DB형과 DC형을 동시에 운영하는 경우에는 DC형으로 전환해 중도인출을 하는 방법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의료비는 퇴직연금 가입자 본인 연간 임금총액의 12.5%를 넘어야 중도인출 할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쉽게 말해 총급여가 1억원이라면 의료비가 1250만원을 넘어야 퇴직연금에서 중간에 자금을 뺄 수 있다. 단, IRP형에 가입된 경우에는 가입자가 퇴직 후 근로소득이 없는 경우라면 연간 임금총액 기준을 적용받지 않는다.

또한, 의료비에 어떤 항목이 포함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소득세 시행령에 따르면 의료비에는 ▲진찰·치료·질병 예방을 위해 의료기관에 지급한 비용 ▲치료·요양을 위해 의약품을 구입하고 지급한 비용 등이 포함된다. 다만, 간병비나 의료비 중 실손보험을 통해 이미 받은 비용은 퇴직연금에서 중간에 인출할 수 없다.

의료비 중도인출 사유에 해당된다면 횟수에는 제한이 없다. 은행 관계자는 “요양 기간과 비용, 임금총액 기준을 충족하는 경우라면 반복해서 의료비 중도인출이 가능하다”라고 했다.

◇ 의료비 퇴직연금 중도인출 시 세율 따져봐야

의료비 퇴직연금 중도인출 시 세금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퇴직연금을 중도인출할 때 기타소득세 16.5%가 적용된다. 하지만 장기요양 사유의 퇴직연금 중도인출은 소득세법상 부득이한 인출에 해당해 퇴직소득세 30%가 절감된다.

일러스트=정다운

퇴직연금을 구성하는 재원의 인출 순서에 따라서도 세금이 다르게 부과된다. 퇴직연금은 ▲세액공제 받지 않은 자기 부담금 ▲퇴직금 ▲세액공제 받은 자기 부담금 ▲수익금(이자) 순으로 인출이 된다. 세액공제 받지 않은 자기 부담금과 수익금에 대해서는 연금소득세율(3.3~5.5%)이 적용된다. 그러나 세액공제를 받은 자기부담금이라면 퇴직소득세(16.5%의 70%에 해당하는 세금)가 적용돼 세율이 더 높아질 수 있다. 세액공제를 받지 않은 자기 부담금의 비중이 큰 퇴직연금 가입자라면 의료비 중도인출의 세금 부담이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

노대희 신한PWM강남센터 PB팀장은 “퇴직연금 인출 시 가장 먼저 세액공제를 받지 않은 자기 부담금이 1순위로 인출이 된다”라며 “두 번째는 퇴직금 재원이며 세액공제를 받은 자기 부담금과 수익금이 나온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노 팀장은 “세액 공제를 받지 않은 자기 부담금의 비중이 많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인출의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퇴직연금 중도인출을 활용하는 편이 좋다”라고 덧붙였다.

노 팀장은 “만약 세액공제를 받지 않은 자기부담금의 비중이 거의 없고, 그 이상의 금액이 필요한 경우라면 세율이 할인되기는 해도 퇴직소득세가 과세가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연금을) 담보로 제공해서 내게 될 이자 금액을 비교해서 (의료비 마련 방안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