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못 들었어요.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신한은행 모바일 뱅킹 애플리케이션(앱) ‘쏠’에 탑재된 음성 안내 서비스 속 비서가 거듭해서 물었다. 되도록 정확한 발음을 하려고 노력하며 계좌이체 할 금액과 대상을 반복해서 말했다. 몇 차례 시도 끝에 이번엔 성공하는가 했더니 “이체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라”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화면을 볼 수 없는 사람들한테는 불가능 한 일이다.

어찌어찌 해서 일단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음성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드디어 이체가 완료된 줄 알았지만 막상 화면을 보니 비밀번호 4자리를 누르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비밀번호 도난 방지를 위해 입력해야 하는 숫자 배열도 무작위로 배치돼 있었다. 앞이 안 보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보안이 필수적인 계좌 비밀번호를 알려줘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국내 은행들이 오프라인 지점을 줄이는 대신 예금조회·계좌이체·상품가입 등의 업무를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에서 손가락 클릭 몇번으로 할 수 있게 체질을 바꾸고 있다. 코로나19가 이러한 변화에 불을 당겼다. 모바일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겐 편해졌지만, 이런 언택트 뱅킹(비대면 은행 업무 서비스)이 달갑지 않은 이들도 있다. 25만명에 달하는 국내 시각장애인들도 언택트 뱅킹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 중 하나다. 음성 안내 서비스가 없고, 시각장애인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비밀번호 입력 시스템 때문에 앱 사용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기자가 안대를 착용한 뒤 모바일 뱅킹 앱을 사용하고 있다./조연우 기자

◇ 음성안내 서비스 없는 모바일 뱅킹 앱…간단한 계좌이체도 불가능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모바일 앱을 사용해보기 위해 기자가 직접 안대를 착용해 봤다. 휴대전화에 탑재된 인공지능 개인비서 ‘빅스비’를 이용해 하나은행 모바일 뱅킹 앱 ‘하나원큐’에 들어갔다. 보유한 카드를 앱에 등록하고 QR결제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약관에 동의한 뒤 본인인증과 비밀번호 4자리를 입력하면 해결될 간단한 일이었지만, 이내 카드 등록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버튼을 눌러야 카드 등록을 할 수 있는지 화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은행 영업점에 전화해 시각장애인을 위한 앱 자체 음성안내 서비스가 있는지 문의했지만, 그런 기능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은행원은 주민등록증과 통장, 통장인감을 지참해 영업점을 방문해야만 점자형 보안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하나은행은 장애인도 앱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준수했다는 ‘앱 접근성 인증’을 받았지만, 정작 시각장애인들은 앱이 아닌 지점에 방문해야만 업무를 볼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하나은행 모바일 뱅킹 앱 ‘하나원큐’ 화면./모바일 앱 캡처.

우리은행 모바일 뱅킹 앱 ‘우리WON뱅킹’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서비스는 없었다. 시각장애인이 앱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문의하니 우리은행 상담원은 “삼성 스크린 리더 ‘보이스 어시스턴스’ 앱을 다운받으라”고만 했다. 이 앱은 화면 속 글자를 읽어주는 기능을 제공한다.

보이스 어시스턴스와 동일한 기능을 가진 앱 ‘토크백’을 실행시키고 하나원큐 앱 화면에서 아무 버튼을 누르니 “모든 상품”과 “청약”이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계좌이체를 하기 위한 ‘송금’ 버튼을 찾기 위해 이전 화면으로 되돌아가려 했지만, 인식이 되지 않아 5분 넘게 제자리 걸음만 했다. 다른 앱 알림 문자까지 일일이 음성으로 안내돼 앱 사용에 온전히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10분이 지나면서 자동으로 로그아웃이 됐고 송금 버튼을 찾는 데 실패했다.

시각장애인들은 모바일 뱅킹 앱 사용은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는 “안드로이드와 iOS 기반 음성 서비스가 있더라도 모바일 뱅킹 앱을 사용하면 방화벽 문제로 연결이 자꾸 끊긴다”며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가족이나 지정된 장애인 활동 지원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음성 OTP, 점자보안카드가 있지만 입출금과 잔액 정도만 확인할 수 있다”며 “시각장애인 혼자서 앱 서비스를 이용하기는 물리적으로 힘들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