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에서 정미소를 설립한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 점원으로 일했던 쌀가게를 물려받아 사업을 시작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시판 중인 껌을 모조리 씹어보고 개발해 일본 시장을 공략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이들은 대한민국의 산업을 일군 자수성가형 창업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시대에도 꿋꿋하게 사업의 본질을 파고들어 당당히 한국 경제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중소기업인들을 소개한다.[편집자주]

‘파산 직전이었던 아버지 회사를 덜컥 물려받은 20대 아들이 사업 구조를 확 바꿔 회사를 유명 중소기업으로 성장시킨다.’

드라마 작가들도 비현실적이라며 고개를 내저을 법한 성공 스토리를 실현한 사람이 있다. 요즘 한국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이 명동과 공항 면세점에서 쓸어가는 허니버터아몬드·와사비아몬드·군옥수수아몬드 등 일명 아몬드 시리즈를 만든 회사 HBAF(바프)의 윤문현(45) 대표다. HBAF는 작년 한해 1억1000만 봉지가 넘는 견과류를 팔았다.

바프는 대표 제품인 허니버터아몬드의 인기를 발판으로 현재 34가지 맛의 아몬드 및 견과류를 16개가 넘는 국가에 수출하고 있다. 2021년 매출 1163억원, 영업이익 102억원을 기록, 영업이익률이 10% 넘는 견실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윤 대표가 2006년 회사를 그야말로 ‘덜컥’ 물려받았을 당시 바프(길림양행)는 아몬드 수입사였다. 합격한 대기업에 첫 출근이 일주일도 안남았을 때 부친 윤태원 회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당장 회사를 수습하려고 출근해 재무제표를 봤더니 자본잠식 상태였다. 아몬드 수입이 쉬워지자 공급선이 끊겨 빚을 내서 버티는 상황이었다. 하루 하루가 생존 싸움이었다.

2일 오후, 서울 강남구 바프 서울 사무실에서 윤문현 대표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3.3.2 / 고운호 기자

이대로는 안된다고 판단한 윤 대표는 회사를 ‘단순 유통사’에서 ‘제조사’로 개조하자고 마음먹는다. 해외 가공 견과 시장을 보면서 아몬드에 맛을 입히는 법을 고민했다. 윤 대표는 기름이 아니라 당을 입힌 코팅 방법을 직접 개발했다. 회사에 개발실이 없어 직접 집에서 만들었다. 사업화를 고민하던 와중에 편의점 GS25의 의뢰를 받아 만든 ‘허니버터 아몬드’가 재도약의 발판이 됐다.

누군가는 허니버터 아몬드의 성공을 우연이라 말하지만 윤 대표는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잡을 수 있었던 기회’라고 말했다. 허니버터 열풍이 불면서 유통업계 곳곳에서 허니버터 관련 제품이 쏟아졌지만 바프는 새로운 맛을 계속 선보여 회사 규모를 키울 수 있었다. 2014년 650억원이었던 매출은 협업 1년 차인 2016년 1260억원으로 2배 가량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11억원에서 143억원으로 10배 이상 급증했다. 2021년에는 사명을 길림양행에서 HBAF로 변경하며 브랜딩에 나섰다.

배우 전지현이 출연한 바프 광고./바프 제공

윤 대표는 바프를 독일 젤리 회사인 ‘하리보’나 스위스 식품 업체인 ‘네슬레’ 같은 세계적인 종합식품기업으로 키우겠다는 포부다. 현재까지 초콜렛 과자, 시즈닝 팝콘, 하루 견과 등 다양한 제품을 출시했고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초콜릿 과자 몰트볼은 출시 후 편의점 CU에서 비슷한 과자류로 분류되는 해외 과자 몰티저스 매출을 넘었고 시즈닝 팝콘은 편의점 세븐일레븐에서 새우깡보다 많이 팔렸다. 다음은 윤 대표와의 일문일답.

◇ “부친 쓰러지고 파산 직전 회사 물려 받아... 영업·개발 직접 했다”

-2006년 부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회사를 갑자기 물려받게 됐다.

“사실 아버지가 살아왔던 삶은 제가 살고 싶었던 모습은 아니었다. 당시 길림양행은 미국에서 아몬드를 수입해 국내로 공급하는 단순 무역업이었는데 물건을 살 때도 팔 때도 ‘을’이었다. 브로커는 전문성이나 나의 경쟁력을 키울 수 없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다 나만의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합격한 대기업에 첫 출근이 일주일도 안남았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당장 출근해 회사를 수습하려고 해보니 회사는 자본잠식 상태였다. 공급선이 다양화되면서 아몬드 수입이 쉬워지자 공급처도 끊기고 수익이 나지 않는데 빚을 내서 버티는 상황이었다. 하루 하루가 생존의 문제였다.”

-자본잠식 상태에 가까운 회사를 10년 만에 연(年) 매출 1000억원 이상으로 성장시켰다.

“그간 부친이 하던 단순 유통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공장부지만 사놓고 쓰러지셨는데, 대금을 못내 부도 위기였다. 천운으로 SPC와 대형 납품계약을 체결했다. 기회는 또 찾아왔다. 대형마트가 자체 브랜드(PB) 제품을 만드려고 나서는 때였는데, 우리 회사가 PB제품을 만들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마트 PB를 하다보면서는 마진이 너무 적어 자사 제품을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소 식품기업이 자기 브랜드 제품을 만드는 사례는 드물다. 해외 가공견과 시장을 보면서 우리나라도 곧 저런 제품 수요가 생길텐데 그때 그 시장을 선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가공 기술을 고민하면서 아몬드에 맛을 입히는 법을 고민했다. 이때 기름이 아닌 당을 입힌 코팅 방법을 직접 개발했다. 개발실도 없을 때라 직접 내 집에서 개발했다. 이 코팅법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기적처럼 GS25에서 허니버터 아몬드를 만들어 보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이 기회는 단순히 운이 아니라 많은 준비를 하고 있어서 잡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허니버터 아몬드가 대박이 나면서 한 달 매출이 두 세배씩 뻥튀기가 됐다.

이때 차기작인 와사비 아몬드를 개발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제품을 선보였고 시장에 먹혔다. 허니버터 아몬드는 금세 남들이 따라할 수 있으니 우리만의 독자적인 레시피가 필요했다. 허니버터에서 멈추지 않고 독자적인 맛을 만들어낸 것이 결국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본인의 어떤 리더십이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난 철저히 실무형 인간이다. 영업,개발 등 모든 과정을 내가 했다. 원주에 건설 중인 공장도 내가 설계했다. 허니버터, 와사비, 카라멜 아몬드를 내가 직접 개발했다. 물론 앞으로 변해야 하는 회사의 리스크라고 생각한다. 예전엔 열악한 환경에서 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했지만 이제 회사 규모가 커졌고 각 분야 전문가들이 키워나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연주자가 아닌 지휘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사업체를 갑자기 물려 받았는데 이를 성장시킨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다. 제대해서 보니 회사는 기울어가고 직원들 월급도 겨우 주는 상황이었다. 집도 날아간 상황이었다. 가족들도 경제적 어려움에 생활에 지장을 겪었다. 어떻게든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다. 물론 아버지가 꾸려놓았던 아몬드 사업의 유산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밑바닥부터 시작했다고는 할 수 없다. 정말 기회가 없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가지고 있던 활로를 활용해 사업모델 전환에 성공한 사람이다.”

◇ “자동화 공장 준공...내년 연매출 2000억 달성 기반 마련”

-2021년 길림양행에서 바프로 사명을 교체했다.

“바프(HBAF)는 내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허니버터아몬드앤프렌즈(Honeybutter almonds and friends), 헬띠벗어떰플레이버(Healthy but awesome flavour)라는 중의적인 뜻이다. 희한한 이름이니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재작년 전지현씨를 기용해 광고비에만 200억원을 썼다.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TV광고를 꿈도 못 꾼다. 차라리 설비에 투자한다. 하지만 꼭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쓸 이름의 인지도를 위한 결정이었다. 당장의 수익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로 진출을 하려고 하는데 내 이름이 명확하지 않은 회사로는 대자본에 금방 따라잡힐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즈닝 아몬드 이후 사업 다각화를 시도하고 있나.

“이제는 아몬드 종류를 다양화하기보다 초콜릿과 김, 팝콘 등 다양한 식품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초콜릿 제품인 몰트볼을 출시했는데 이 제품이 CU에서 비슷한 해외 제품 ‘몰티저스’ 매출을 이겼다. 시즈닝 팝콘은 세븐일레븐에서 시범 판매를 하고 있는데 세븐일레븐에서 새우깡보다 더 많이 팔렸다. 두 제품 다 1년 여 시범 판매를 했는데 확실히 검증이 됐다고 보고 올해 판매처를 타 유통사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향후 사업 계획은 어떻게 되나.

“올해 1월 시즈닝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완전 자동화 공장의 준공을 마쳤다. 이제부터 매출이 비약적으로 도약할 거라고 생각한다. 일단 내년 연매출 2000억원을 뚫을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예정이다.

건강 관련 제품을 개발해야 승부를 볼 수 있다고 본다. 월화수목금토 매일 다른 구성의 견과를 판매하는 주단위 견과 제품을 작년에 시범적으로 판매했는데 매출이 100억을 넘겼다.

해외 진출의 경우 미국을 발판 삼으려고 하는데 전국적인 영업력을 가진 현지 회사와 협업해서 하와이 등 관광 상권에서부터 본토 진출로 확장하는 것이 목표다. 미국에서 성공하면 5년 이내 국제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

플레이버스바이바프 레스토랑/업체 제공

-지난해 레스토랑을 개업하는 등 F&B 기업으로도 진출을 꾀하고 있다.

“작년에 가로수길에 ‘플레이버스 바이 바프’라는 레스토랑을 개업해 현재 직영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 레스토랑을 테스트베드로 삼아서 선호도 높은 브런치 메뉴들을 따서 가맹 형태의 브런치 카페로 확장할 계획이다. 이 브랜드를 기반으로 밀키트 등 식품을 만들어 마켓컬리같은 곳에 팔 수도 있다. 아직 매출이 많지 않아도 늘어나는 것을 보니 바프 사업 초창기와 같은 보람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