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국제적 아동탈취의 민사적 측면에 관한 협약(헤이그 아동탈취 협약)’ 불이행 국가로 지정됐다. 이 협약은 배우자 한쪽이 해외로 불법 이동시킨 아동을 신속하게 원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1980년 제정됐다. 한국은 2012년 협약에 가입했는데 10년 만에 불이행 국가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한국과 함께 불이행 국가에 이름을 올린 국가들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온두라스, 인도, 루마니아 등이다. 한국이 아동탈취 문제가 빈번한 국가라는 불명예를 쓰게 된 이유는 뭘까.

한국을 불이행 국가에 올린 미 국무부는 한국에 대해 “아동인도 집행을 위해 필요한 다수 절차들이 지연을 야기하고 있다”며 “아동을 탈취한 부모가 자발적으로 아동반환 명령에 따르지 않는 패턴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 8월 기준 미국에서 한국으로 아동이 탈취된 사건은 총 18건에 달하는데, 이중 4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경기 과천 법무부 모습. /뉴스1

미국인 시치 잔 빈센트(Sichi John Vincent·51)도 그 중 하나다. 그는 2013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에 여행을 왔던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5살 아들 A군과 3살 딸 B양과 함께 미국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2019년 11월 돌연 자녀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빈센트씨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자녀들에 대한 양육권 청구 소송을 냈고 승소했다. 아내가 미국 법원의 결정을 따르지 않자 빈센트씨는 한국에 들어와 서울가정법원에 직접 소송을 냈다.

한국 법원도 국제협약에 따라 자녀들을 빈센트씨에게 반환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서울가정법원은 자녀들의 양육권이 빈센트씨에게 있다고 봤고, 이 판결은 대법원까지 가서 올해 초 최종 확정됐다.

미국 법원에 이어 한국 법원에서도 빈센트씨의 손을 들어줬지만, 빈센트씨는 여전히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집행관이 법원의 명령을 집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유아인도 집행을 위해 빈센트씨의 자녀들을 찾아간 집행관은 아이들이 엄마 곁에 있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집행을 포기했다.

하지만 집행관의 설명은 법원이 이미 근거가 없다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앞서 서울가정법원은 ‘아이들이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어한다’는 아내 측 주장을 기각하면서 “자녀들 나이는 만 4세, 만 2세로 그 의견을 고려하는 것이 적절할 정도의 연령과 성숙도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빈센트씨는 “아이들을 만날 수 없고, 아이들이 살아있는 아버지를 모른 채 커 간다는 사실이 제일 두렵다”며 “이런 비극이 계속되지 않도록 한국 정부는 약속(헤이그 아동탈취 협약)을 지켜달라. 아이들의 집인 샌프란시스코로 아이들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아내 측은 빈센트씨가 아이들과 함께 기한 없이 한국에 체류할 것에 동의했으며, 자녀들이 이미 한국에 적응했기 때문에 헤이그아동탈취법에 따른 ‘반환예외사유’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빈센트씨 같은 사례가 계속되자 미 국무부가 결국 한국을 협약 불이행 국가로 지정한 것이다. 법조계에서는 협약 이행을 책임지는 주무부서인 법무부가 나서서 제도 개선을 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국내에는 양육권을 가진 부모에게 아동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는 법·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법상 아동을 대상으로 한 강제집행의 근거는 민사집행법이다. 민사집행법은 ‘채무자가 특정한 동산 등을 인도하여야 할 때 집행관은 이를 채무자로부터 빼앗아 채권자에게 인도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동인도 청구도 이 규정에 준해서 진행되고 있는데, 양육권을 가진 부모에게 아동을 인도하는 집행과정과 냉장고·텔레비전·가구 등 유체동산에 대한 강제집행 과정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법이 이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보니 빈센트씨 사례처럼 집행관이 법원의 판결을 따르지 않는 혼선이 생기는 것이다.

해외에선 이미 협약에 맞춰서 아동을 양육권을 가진 부모에게 보낼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 놓은 상태다.

독일은 아동인도 집행에 있어서는 일정 수준의 물리력 행사를 허용하고 있다. 미국은 아동심리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전문가가 집행에 함께 참여한다고 한다. 한국처럼 만 4세, 만 2세된 아이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묻는 게 아니라, 아이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정당한 양육권자를 가진 부모에게 인도하고 있다. 양육권이 없는 부모가 인도를 수 차례 거부할 경우 곧바로 구금될 수 있다.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협약에 가입한 일본은 적극적인 제도 마련을 통해 불이행국 리스트에서 제외됐다. 일본은 빈센트씨와 유사한 사례가 자주 발생하자 2019년 2월 양육권이 있는 부모에게 자녀를 인도할 수 있는 규정을 민법에 추가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유아인도 강제집행 실무상 직접강제에 소극적인 점이 아동반환 집행 지연의 주요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며 “집행관의 인도집행 시에 (아동을) 탈취한 부모와 오랜 기간 함께 거주한 아동이 거부의사를 밝히다 보니 집행 자체가 어려워지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국 측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양국 중앙당국간 대화 채널을 이미 개설하여 가동 중”이라며 “우리 법원과도 헤이그 아동탈취 협약 관련 사건 처리 장기화에 관한 미국 측의 우려와 관련하여 심판 및 강제집행 절차의 신속성 제고 등 개선방안을 협의해나갈 예정”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