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 사건 현장에 낭자한 핏자국은 범행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범인이 현장에서 달아나도 남은 핏방울은 범인이 누구인지, 범행 도구는 무엇이었는지 알려주는 첫 번째 증인이다. 혈흔형태분석전문수사관은 현장에서 핏자국이라는 증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모든 핏자국에는 이유가 있다. 어지러이 흩어진 것처럼 보이는 핏자국도 그만한 크기와 모양을 가진 이유가 있다. 누군가 총탄에 맞았다면 미세한 원형 핏방울이 흩뿌려져 ‘비산혈흔’이 남고, 떨어진 핏방울들이 다른 물체에 의해 닦이면 ‘비(非)비산혈흔’인 ‘옮긴 혈흔’이 남는다. 50여 개로 분류되는 핏자국은 흉기에 대한 정보만 증언하는 것이 아니다. 범행 시각, 범죄 행위까지 알려준다. 혈흔형태분석전문수사관은 핏자국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하고, 진실에 다가선다.

김천회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과 혈흔형태분석전문수사관(경위)이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김민소 기자

경찰은 지난 2005년 혈흔형태 분석을 수사에 도입했다. 2008년에는 한국혈흔형태분석학회가 설립됐고, 2009년 경찰수사연수원에서 관련 과목을 개설했다. 최근 1~2년 새 면식범에 의한 범죄 발생이 증가하면서 혈흔형태 분석의 중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면식범에 의한 범죄 현장에는 지문이나 유전자가 뒤섞여있어, 증거 능력을 상실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올해 2월에는 서울경찰청에 3명의 전문수사관이 포진한 혈흔형태분석전담팀이 생겼다. 국내에 전담팀이 꾸려진 것은 처음이다.

조선비즈는 서울경찰청에서 혈흔형태분석전담팀을 이끄는 김천회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과 혈흔형태분석전문수사관(경위)을 지난 23일 만났다. 김 수사관은 현재 국제혈흔형태분석전문가협회(IABPA)에 준회원으로도 가입돼 있다. 오는 10월에 IABPA 정회원이 되면 국내에서 두 번째가 된다.

김 수사관은 1999년 경찰에 입문했다. 이후 과학수사과에서 화재 감식을 비롯해 다양한 사건 현장 감식 업무를 해왔다. 2017년, 김 수사관은 새로운 분야를 연구하고자 혈흔형태 분석에 뛰어들었다.

김 수사관은 “혈흔은 사건의 또 다른 목격자”라며 “사명감을 잃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그는 “이 순간이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스모킹건이 되는 혈흔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다음은 김 수사관과의 일문일답.

-혈흔형태전문수사관은 어떤 일을 하나.

“사건 현장에 가능한 빨리 도착해 혈흔을 관찰한다. 현장에 남은 모든 혈흔이 분석 대상이므로, 조금이라도 덜 훼손된 현장을 보기 위해 가능한 빨리 간다. 이후 육안으로 혈흔을 관찰한다. 혈흔 형태를 분류하고, 자연과학 법칙에 근거해서 혈흔이 분출된 원인과 시점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현장에서 어떤 행위가 있었을지 사건을 재구성한다.”

-혈흔을 분류하는 체계가 있나.

“혈흔의 종류는 50여 개에 이른다. 수십여명의 목격자가 있는 셈이다. 가장 큰 분류는 ‘비산혈흔’과 ‘비(非)비산혈흔’이다. 혈액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 흩뿌려진 형태를 비산혈흔, 그렇지 않은 형태를 비비산혈흔이라 한다. 이후 혈흔이 형성된 과정에 따라 세부적인 분류를 한다.”

-주로 어떤 사건에 출동하고, 분석을 마칠 때까지 얼마나 걸리나.

“둔기나 흉기에 의한 충돌이 발생할 때 신체에서 피가 분출된다. 다툼이 큰 강력 사건이 많고, 주로는 살인 사건이다. 한 번 출동하면 현장에서 짧게는 5시간, 길게는 13시간까지 있었다. 분석 결과를 낼 때까지 보름 정도 걸린다. 올해 2월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과 혈흔분석 전담팀에 배치받고 나서는 현재까지 17건 정도를 처리했다.”

김 수사관의 혈흔형태 분석이 수사를 해결하는 스모킹건이 된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재작년 서울에서 가족 간 상해치사 사건을 풀어낸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수사관들은 피해자 A씨가 친형인 B씨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는 심증만 있었을 뿐 물증이 없는 상태였다.

‘삼형제가 거주하는 주택’이라는 특성상 유효한 증거를 수집하기도 어려웠다. 피해자와 피의자가 함께 사는 거주지였으므로 지문, 유전자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증거 능력을 인정받기가 힘들었다. 부검 결과도 ‘사인 불명’으로 나와 1심 재판에서는 B씨에게 상해죄만 인정됐다.

2심 재판에서 결과가 뒤바뀌었다. 김 수사관의 혈흔형태 분석이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가 됐기 때문이다. 혈흔형태 분석은 A씨에게 두 차례에 걸친 심한 폭행이 가해졌다는 걸 보여줬다. B씨는 안방 방문 옆과 현관 출입문 근처에서 A씨에게 심한 폭행을 가했고, 이후 출입문으로 기어가던 A씨를 B씨가 수 차례 폭행해 A씨가 사망에 이른 것이다.

2심 재판부는 김 수사관이 작성한 혈흔형태 분석 결과서를 토대로 B씨에게 ‘상해치사죄’를 적용해 판결을 내렸다. 이후 2심 재판부의 판결이 확정돼 사건은 종결됐다.

김천회 수사관이 수사교육원에서 혈흔형태 분석 교육을 하고 있다(왼쪽). 김천회 수사관이 현장에서 혈흔형태 분석을 하는 모습(오른쪽)./서울경찰청 제공

-분석에 주관이 개입되진 않나.

“혈흔을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은 맞지만, 혈흔형태 분석은 생물학, 삼각함수 같은 자연과학 법칙에 근거해서 이뤄진다. 혈흔형태 분석에는 4대 법칙이 있다. 교환법칙, 중첩의 법칙, 횡적 연속성의 법칙, 고고학에서 사용하는 연대기 법칙. 혈흔의 모양과 위치, 크기, 각도 등을 도구를 이용해서 측정하고 이런 과학적 법칙들에 기반해 혈흔을 분포시킨 일련의 행위를 시간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혈흔을 관찰하는 일이 쉽지 않다.

“오랜 시간 피 냄새를 맡는 게 힘들긴 하다. 정신적으로 힘들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운동을 많이 한다. 재판 현장에서 거짓 진술을 보거나 혈흔형태 분석으로 진실을 밝혀내면 사명감을 느껴서 트라우마가 없어지는 것 같다. 이 순간이 진실을 밝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면 사명감이 각인된다.”

-혈흔형태 분석이 발전하기 위해선 어떤 게 필요할까.

“수사관을 양성할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과 수사관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이 뒷받침되면 좋을 것 같다. 수사연수원에서 3주 정도 교육을 받지만, 처음부터 분석을 자신 있게 할 순 없다. 15건 정도를 분석하면 눈이 떠진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투입될 수 있는 현장은 그보다 훨씬 적다. 현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젊은 수사관들에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오랜 시간 좁은 장소에서 혈흔을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보니, 혈흔형태 분석가들에 대한 처우 개선도 이뤄지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