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사(deaths of despair)’는 반복되는 절망 속에서 삶에 대한 의미를 상실한 채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201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이 만든 표현으로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자살이 원인이 된 죽음을 포함한다. 현대 사회는 촘촘한 사회복지 시스템과 의료기술의 발전 덕분에 기대 수명이 증가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중년 백인의 사망률이 오히려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를 연구한 디턴이 절망사가 원인이라는 걸 찾아내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했다. 절망사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선비즈는 한국 사회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자리잡은 절망사의 현실을 진단하고, 해결책과 대안을 고민해보고자 한다.[편집자주]

스물아홉의 평범한 청년이었던 기혁(가명)씨는 지난 5월 초 서울 관악구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 카카오톡으로 친구에게 ‘죽고 싶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평소에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기에 친구는 별 생각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마지막 메시지 이후 연락이 되지 않자 친구는 기혁씨의 아버지에게 알렸고, 아버지의 신고를 받은 119 대원이 문을 뜯어내고 들어가 기혁씨를 발견했다.

기혁씨는 BTS를 좋아하는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다. BTS 팬클럽에서 부인을 만나 결혼까지 했다. 두 사람은 SH공사(서울주택도시공사)가 지원하는 신혼부부 주택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취업이 쉽지 않았고,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 탓에 경제적인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영국인이었던 기혁씨의 부인은 어느 날 갑자기 영국으로 돌아가버렸다.

지난 5월 세상을 떠난 기혁(가명)씨의 서울 관악구 자택 모습. 방 한 쪽 벽면에 코인 차트가 가득하다. /바이오해저드 제공
지난 5월 세상을 떠난 기혁(가명)씨의 서울 관악구 자택 모습./바이오해저드 제공

컴퓨터가 놓여 있는 기혁씨의 방 한 쪽 벽은 온갖 가상화폐 차트로 가득했다. 컴퓨터 마우스를 건드리자 깜깜했던 모니터가 밝아졌다. 기혁씨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썼을 유서가 있었다. 자신을 떠난 부인,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기혁씨의 삶은 장밋빛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금방 취업에 성공해 자신이 좋아하는 BTS 콘서트를 직접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취업 실패와 가상화폐 투자 실패가 반복되고, 사랑하는 부인에게 버림받은 데다 아버지와의 관계까지 망가지면서 기혁씨는 조금씩 절벽으로 밀려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지난 4월 말에는 서울 강서구에서 50대 남성인 재수(가명)씨가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삶의 희망을 잃고 외부와의 교류를 끊은 채 세상과 이별했다.

재수씨도 처음부터 삶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는 하나뿐인 오토바이를 타고 퀵 배달을 하며 지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끝나가면서 배달 일거리가 많이 줄었다고 했다. 그래도 좋았다. 하지만 재수씨의 삶에 대한 의지를 꺾어버린 사건이 터졌다.

지난 4월 서울 강서구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난 재수(가명)씨의 집 문에 붙어 있는 주민센터의 복지 안내문./바이오해저드 제공

어느 날 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던 재수씨는 고가도로에서 역주행하며 내려오던 자전거와 충돌했다. 자전거가 고가도로를 역주행하다가 난 사고지만 오토바이라는 이유로 재수씨가 가해자가 됐다. 자전거를 탄 사람은 재수씨를 상대로 2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억울했던 재수씨는 1년에 걸쳐 재판을 받았지만 결국 패소했다.

혼자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재수씨의 삶은 이때부터 망가졌다. 500만원의 집 보증금을 조금씩 빼서 겨우 하루하루를 버텼다. 월세는 1년이 넘게 밀렸다.

재수씨가 떠난 현장을 청소한 김새별 바이오해저드 대표는 재수씨의 집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음식 대신 재수씨의 집에는 낙첨한 로또 복권 용지만 수백 장이 있었다. 몇 년 동안 재수씨는 매주 로또 복권을 마지막 희망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끝내 재수씨에게 미소를 보이지 않았고 빈 속에 쓰린 술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재수씨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혁씨와 재수씨는 나이도 다르고 거주하는 지역이나 상황도 다르지만 삶에 대한 의지를 잃은 채 죽음에 이르렀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망진단서에 적힌 공식 사인은 다르지만,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절망’이라는 소리 없는 살인자였다. 한국 남성의 평균 기대 수명은 80세지만 두 사람은 절망 속에 각각 51년, 27년 빨리 세상을 떠났다.

절망사는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앵거스 디턴과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인 앤 케이스가 찾아낸 현상이다. 두 사람은 1999년부터 2017년 사이 미국 백인 중년층의 사망률이 증가한 원인을 연구했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기대 수명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유독 백인 중년층에서만 사망률이 늘었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 자살과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이 사망률 증가를 이끌었다는 걸 찾아냈다. 두 사람은 자살과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의 근본적인 원인이 절망감과 박탈감이라는 점에서 ‘절망사(deaths of despair)’라는 이름을 붙였다.

디턴은 연구 결과를 담은 책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절망사라는 유행병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나 한국을 가리켜 OECD 가입국 중 자살률이 1위인 만큼 절망사 문제를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과연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는 얼마 전 ‘한국의 절망사 연구 : 원인 분석과 대안 제시’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강상준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가 한국의 절망사 실태를 조사한 보고서다.

보고서는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의 절망사가 얼마나 늘었는지 보여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에는 절망사로 분류할 수 있는 죽음이 8843명이었다. 알코올로 인한 죽음이 2575명, 약물이 12명, 자살이 6256명이었다. 20년 뒤인 2020년에는 알코올이 4943명, 약물이 365명, 자살이 1만2528명으로 절망사가 1만7836명에 달한다. 20년 동안 절망사가 2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그래픽=손민균

자살은 2010년 정점을 찍은 이후 감소세다. 하지만 여전히 매년 1만2000명 이상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알코올로 인한 사망도 20년 전보다 2배 가까이 늘었고, 약물로 인한 사망은 규모 자체는 적지만 증가 속도가 매우 가파르다.

한국의 절망사는 미국과 달리 성별이나 연령, 학력 수준을 따지지 않고 증가하는 점이 특징이다. 미국은 백인 중년층을 중심으로 절망사가 늘었지만, 한국은 청년층과 고령층 할 것 없이 모두 절망사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예컨대 자살의 경우 2020년 사망원인 중 5위에 해당하지만 10~30대 청년층에서는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한다. 디턴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의 자살률은 24.6명(2019년 기준)으로 OECD 평균인 11.0명의 2.2배에 달한다. 리투아니아와 엎치락뒤치락하며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지키고 있다.

최근 들어 청소년(9~24세) 자살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청소년 자살률은 11.1명으로 2016년 7.7명에서 불과 4년 만에 3.4명이 늘었다.

김성우 서울시자살예방센터 상담팀장은 “한 달에 평균 2800건 정도 상담 전화를 받는다. 이전에는 50대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2030′ 청년층의 상담이 많이 늘었다”며 “독립해서 혼자 생활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물리적으로 느끼는 단절감이나 심리적 외로움이 함께 커진 것 같다”고 진단했다.

알코올이나 약물로 인한 사망자도 특정 연령, 특정 계층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알코올로 인한 사망자를 보면 2000년만 해도 고졸 이하가 2465명, 대졸 이상이 110명으로 고졸 이하의 비율이 높았다. 하지만 2020년에는 고졸 이하가 3925명, 대졸 이상이 1018명으로 대졸 이상의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약물로 인한 사망자도 과거엔 대부분 고졸 이하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대졸 이상의 비율이 늘었다.

알코올중독전문 카프성모병원의 하종은 원장은 “알코올 중독 문제를 40대 남성의 것으로만 치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최근에는 여성이나 ‘2030′ 청년들의 중독 문제도 심각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