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서울 소재의 한 기업에서 디자인·마케팅 업무를 하는 직장인 소모(29)씨는 ‘18적금’에 1818원을 넣었다. 이날 퇴근 후에도 업무 지시를 내리는 상사의 전화에 소씨가 느낀 스트레스에 해당하는 금액이라는 게 소씨의 설명이다. 소씨는 “주말에도 지시를 내려서 ‘주말휴일 왜 전화’라는 입금명으로 1818원을 적금 통장에 넣었다”며 “전에는 회의만 2시간 30분 넘게 했어서 회의를 끝내고 바로 18원을 통장에 넣었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 강도에 따라 적게는 18원, 많게는 1818원씩 모으는 적금인 것이다.

소씨는 “20만원 정도 모이면 스트레스에도 잘 버틴 나를 위해 호텔을 잡아 호캉스를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소씨는 적금통장에 적힌 내역을 보여주면서 “적금 내역들에 제가 그 당시에 화가 난 이유들이 적혀 있는데, 그때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났던 것들이 지나고 보니까 일곱 글자로 써 놓은 게 웃기기도 하고, 잘 참으면서 사회생활을 한 제 자신에게 대견한 마음도 든다”고 전했다.

소씨의 '18적금' 중 일부 발췌한 내역. /독자제공

MZ세대인 2030 직장인들 사이에서 ‘18적금’ ‘저주통장’이 인기다. 회사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가 날 때마다 통장에 일정 금액을 넣은 뒤 어느 정도 모이면 ‘고생한 나를 위해 쓰겠다’는 일종의 ‘희망적금’이다. 이들은 적금 통장 이름을 ‘모 부장 청부살인 대신 오마카세나 냠냠’ ‘진상짓 저주스럽지만 내새끼 보러가자’와 같은 방식으로 짓고 화가 날 때마다 스트레스를 다스리면서 적금통장에 돈을 모은다. 어차피 화를 낼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잘 견딘 자신을 독려하고, 돈이 쌓이는 것을 보면서 회사 생활을 버틸 수 있게 됐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직장인 김모(32)씨는 지난주 저녁 퇴근길에 부장 얼굴을 한 번 본 뒤 10만원짜리 스시 오마카세를 먹으러 갔다. 10만원은 해당 부장이 스트레스를 줄 때마다 5000원씩, 1만원씩 적금한 김씨의 저주통장에서 나왔다. 김씨는 “부장이 욕을 하거나 화를 낼 때마다 마음 속으로 부장을 욕하거나 저주했는데, 그러면 감정만 부정적으로 변했다”며 “그 감정들을 돈으로 적립하는 방식으로 바꾸니까 오히려 통장에 돈도 쌓이고 저주하는 마음가짐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장에 다녀온 강영미(30)씨도 직장 생활 중 받은 스트레스가 모인 돈으로 공연 티켓값을 냈다. 이자카야에서 일한다는 강씨는 “밤늦게 만취한 손님이 매장을 찾아 고함지르는 일이 벌어졌을 때 ‘진상 손님 그만’이라는 입금명으로 5000원을, 사장님이 지시를 불명확하게 한 뒤 센스가 없다고 핀잔을 줬을 때에는 ‘제발 똑바로 말해’라는 이름으로 1만원을 적금통장에 적립했다”고 설명했다.

‘18적금’ ‘저주통장’이 스트레스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풀어보겠다는 MZ세대들만의 해결법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성세대들이 회식으로 갈등을 풀거나 스트레스를 감내하는 방식이었던 것과는 달리 MZ세대들은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나 출구를 찾을 줄 아는 세대”라며 “통장이나 적금 형식이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돌파하고 풀기 위한 자금을 모으는 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