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제2금융권 금융회사에서 신용관리본부장으로 재직하던 김모씨는 지난해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 그의 직장 동료 A씨에 따르면 김씨는 상사와 신용사업 방향에 대해 논의하던 중 충돌해 폭언을 듣고 보직이 해제됐다. A씨는 “김씨는 이후 지방으로 발령이 나는 등 보복인사까지 있었다”며 “인사 발령을 받고 정신적 충격을 받아 휴직을 내고 회사 측에 도움 요청 건의를 올렸지만 묵살됐다”고 했다.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하던 디자이너 이찬희씨도 2018년부터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렸다. 당시 신차 디자인을 준비한 이씨는 장시간 노동에 과도한 업무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씨의 직장 동료 B씨에 따르면 당시 임원으로부터는 “디자인 못 하면 지하실 갈 줄 알아” “좀 제대로 공부해라” 등의 폭언이 있었다.

작년 11월 12일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노조원들이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앞에서 직장 내 괴롭힘 해결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직장 내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은행권 직장을 다니던 김씨는 정신적 충격으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다 이달 6일 세상을 떠났다. 현대차에서 근무했던 이씨도 스트레스에 우울증을 얻었고 결국 증세가 악화돼 지난해 9월 복직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씨는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회사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회사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김씨의 도움을 묵살했다. 김씨가 죽은 이후에도 회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선을 긋고 있다. 이씨의 유족은 산업재해를 신청했지만, 회사 측은 개인사로 인한 자살로 회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지 벌써 2년이 넘었지만, 아직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 회사 측에 허용된 조사 재량권이 너무 크고, 고용노동부가 소극 행정으로 일관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12월 3~10일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최근 1년간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는 응답이 전체의 28.5%로 나타났다. 특히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는 직장인 가운데 33.0%는 괴롭힘 수준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보육지부가 보육교사 344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도 1년간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는 응답이 71.5%에 달했다.

반면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개선지도나 검찰 송치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갑질금지법이 시행된 2019년 7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접수된 직장 내 괴롭힘 신고는 1만2997건이었다. 하지만 가운데 개선지도가 이뤄진 건은 23.8%, 검찰에 송치된 사건은 1.2%에 불과했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 10건 중 7건은 단순 종결된 셈이다.

심준형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회사에게 자체적으로 조사해서 결정하는 재량권을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며 “또 고용노동부에서 조사를 나가는 근로감독관 역시 직장 내 사건에 굉장히 소극적으로 임하고,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도 개입하지 않고 회사가 자체적으로 조사하다 보니, 괴롭힘 금지법이 무슨 소용이냐고 비아냥거리는 피해자들도 있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회사 자체 조사가 아닌 국가 기관이나 외부 기관에서 조사가 가능하도록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개정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심 노무사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노무사 사이에선 노동위원회가 직장 내 괴롭힘을 조사하거나, 별도의 외부 기관을 마련해 조사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며 “회사의 자체 조사를 버려야만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실효성이 극대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