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A씨는 자신의 제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협박에 시달렸다. 용기를 낸 A씨는 경찰에 신고했지만, 되돌아온 것은 수사 과정에서의 ‘2차 가해’였다. 경찰은 A씨의 주장보다 가해자의 주장을 더 신뢰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여자 수사관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요구도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경찰청. /연합뉴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경찰청의 의뢰로 실시한 ‘경찰에 의한 2차 피해실태 및 제도 개선방안 연구’에 실린 성폭행·성추행 피해자 심층면접조사의 하나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2018년 8월부터 올해 7월까지 성폭행 등 피해를 당하고 경찰 조사를 받았던 여성 5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81.4%가 피해 신고 접수 단계에서 경찰로부터 2차 피해를 당했다고 답했다.

유형별로는 ‘피해를 사소화하는 발언이나 태도’가 54.2%로 가장 많았다. ‘피해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다는 표현’은 50%, ‘가해자와 합의 종용’은 43.8%, ‘공개된 장소에서 조사’는 43.8%로 집계됐다.

‘사건 진행 절차에 대한 불쾌감이 지속됐다’는 답변도 43.6%에 달했다. 이에 따라 ‘사건 진행을 포기하고 싶었다’는 응답은 36.4%, ‘경찰에 불신이 생겼다’는 의견은 32.7%로 나타났다.

사건 접수 단계뿐만 아니라 수사 과정에서도 2차 피해는 여전했다. 술자리에서 대학 후배에게 성추행을 당한 B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경찰 조사에서 성추행을 거부했다고 수차례 주장했지만, 피해자 진술조서에는 ‘거부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고 기재된 것이다. 경찰은 B씨를 돕기는 커녕 고소 취하를 종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국선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고지받지 못했다.

경찰 조사를 받았던 피해여성 59명 중 69.5%는 사건 접수 후 수사 단계에서 2차 피해를 경험했다고 했다. 이중 ‘피해과정을 지나치게 세세한 부분까지 질문’은 51.2%로 과반을 넘겼다. ‘피해를 사소화하는 발언이나 태도’는 48.8%, ‘피해자 정보를 과도하게 수집’은 46.3%였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피해과정의 세세한 부분을 질문하는 것은 수사 과정상 필수적인 부분일 수 있다”면서도 “수사에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수집하면서도 피해자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경찰도 성인지감수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한국뿐만 아니라 대부분 나라들에서 성범죄 피해자들이 수사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받는다는 건 늘 우려되는 문제였다”며 “일선 경찰관들이나 사법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성인지 정도가 아직 만족할 수준까지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