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마이크론이 지난 2월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HBM3E) 대량생산을 시작했다”고 밝혀 업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최대 화두인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만든 고성능 D램이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인공지능)는 대규모 데이터를 학습시켜 질문에 대한 답의 정확도를 높이는 게 핵심이다. 이때 일반 D램 대비 데이터 용량·속도를 10배 이상 높인 HBM이 사용된다.

2022년 말부터 전세계적인 생성형 AI 열풍에 힘입어 HBM 수요가 급증했다. SK하이닉스가 AI 반도체 시장을 이끄는 엔비디아를 고객사로 확보하며 앞서가는 사이, 마이크론은 한 자릿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고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시장에서 가장 앞선 제품인 4세대 HBM를 건너뛰고 5세대 양산에 나선다고 한 것이다. 마이크론은 두달 전, 현재 한 자릿수인 HBM 시장점유율을 2025년에 20%까지 높이겠다고 밝힌 상황. 당시만 해도 실현 가능하겠냐는 비관론이 많았다.

이로부터 이틀 뒤인 2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SK하이닉스가 전직 연구원 A씨를 상대로 제기한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7월 26일까지 마이크론에 자문, 노무 용역을 제공해선 안 된다”라며 “이를 위반하면 1일당 1000만원을 SK하이닉스에 지급하라”고 했다. 하루 1000만원의 이행강제금은 SK하이닉스 측이 요구한 액수 전액을 법원이 받아들인 것이다.

SK하이닉스 이천사업장 M16 전경. / sk하이닉스 제공

법원이 전직금지 가처분 사건에서 신청인의 요청을 100% 받아들여 이 정도 액수의 이행강제금을 선고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100만~500만원 선에서 결정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가처분 결정이 신청 7개월 만에 이뤄진 것에 대해서도 법조계에선 빠르다는 반응이 나왔다. 가처분 신청 대상자가 해외에 있으면 소송 관계 서류 내용을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송달에만 6개월이 걸린다. 국외 송달은 통지서를 번역하고 외교부와 현지 영사를 거쳐야 하므로 국내 송달보다 오랜 시일이 걸린다.

이 사건에서 SK하이닉스를 대리한 법무법인 화우는 가처분 인용을 얼마나 빨리 받아내느냐가 관건이었다고 말했다. A씨가 SK하이닉스와 맺은 전직금지 약정은 오는 7월 26일 끝난다. 법원의 이행강제금은 선고가 난 시점부터 전직금지 약정 기한까지 적용된다. 선고가 빨리 날수록 A씨가 마이크론을 계속 다니기 위해 법원에 내야 하는 이행강제금이 불어난다. 화우는 최대한 빨리 국외 송달을 해 재판을 본격화 하고, 재판부를 설득해 가처분 인용 결정을 받아야 했다.

가처분 인용 결정을 받아낸 화우 신사업그룹의 이광욱(사법연수원 28기) 그룹장(변호사)은 “HBM 시장에선 SK하이닉스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고 시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 HBM 설계에 참여한 직원의 해외 경쟁사 이직을 막음으로써 기술 유출을 저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라고 말했다. 기술 유출 관련 정부의 정책 자문에 참여해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을 받았던 이근우(35기) 변호사는 “최근 우리가 전통적인 우방이라고 생각했던 국가에게 우리 기술이 넘어가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라며 “이번 판결은 경제 안보 차원에서 국가핵심기술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 HBM 설계하다 퇴사한 직원... 챗GPT 광풍 불 무렵 마이크론 이직

A씨는 2001년 SK하이닉스에 입사해 20여년간 D램과 HBM 설계 관련 업무를 담당하다 2022년 퇴사했다. 그는 “퇴직 후 2년간 마이크론 등 경쟁업체에 취업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전직금지 약정, 국가핵심기술 등의 비밀유지·경업금지 서약서를 작성하고 회사를 떠났다. 국가핵심기술은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가 안전보장, 국민경제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산업기술로 산업통상자원부가 지정한다. HBM을 포함한 D램 설계 관련 기술은 국가핵심기술에 포함된다.

마이크론 싱가포르 생산기지. /마이크론 제공

그런데 A씨가 퇴직한 지 약 1년쯤 지났을 무렵 SK하이닉스는 그가 마이크론으로 이직한 사실을 파악했다. 정확히 언제부터 마이크론에서 근무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전직금지 약정 기간 내에 이직한 것만은 확실했다. 문제는 A씨가 퇴직한 시점이다. 2022년 7월 퇴직 당시 AI 반도체 대장주 엔비디아 주가는 140~150달러에 그쳤으나 그해 하반기 불어닥친 챗GPT 돌풍에 2023년 상반기엔 400달러를 넘어섰다. SK하이닉스로 HBM 주문이 쏟아지는 사이 후발주자인 마이크론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이크론으로선 SK하이닉스와 기술 격차를 최대한 빨리 좁혀야 했다.

SK하이닉스는 최대한 빨리 전직금지 가처분 인용을 받기 위해 그동안 기술유출 관련 사건을 여러차례 맡겼던 화우의 신사업그룹에 SOS를 쳤다. 신사업그룹은 화우 내에서 스타트업으로 불린다. 디지털, AI, 환경, 정보보안 등 신사업 관련 법률 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하게 위해 만들어졌다. 카이스트 출신으로 보안업체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는 변호사,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개발 이력이 있는 변호사 등 인력 구성도 다양하다. 이번 사건에 참여한 정호선(변호사시험 6회) 변호사는 2022년 화우 입사 이래 맡았던 전직금지 가처분 소송에서 모두 승소를 거둔 에이스다.

신사업그룹팀의 첫번째 미션은 ‘최대한 빨리 국외 송달을 하라’는 것이었다. 국외 송달은 소송 관련 서류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외교부, 미국 현지 영사를 거쳐 마이크론에 전달되는 과정을 거쳤다. 화우 변호사들은 가용한 국내외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빨리 서류를 전달해달라고 재촉했다. 한 기업의 일반적인 기술이 아닌,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정보가 유출됐고, 지금도 빠져나가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신속하게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 SK하이닉스 기술 차별성 강조한 화우... “마이크론, 선도업체 영입 절실”

법원은 근로자와 기업이 체결한 전직금지 약정이 유효한지를 ‘사용자의 영업비밀이나 노하우, 고객관계 등 전직금지에 의하여 보호할 가치가 있는 사용자 이익이 존재하는지’ 등을 고려해 판단한다. 헌법에서 직업선택의 자유와 근로의 권리를 기본권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A씨가 퇴사 전 HBM 관련 업무를 했기 때문에 마이크론에서도 같은 업무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화우는 이에 더해 A씨가 해외 유학이나 근무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스카우트 됐다는 점을 들어 HBM 관련 업무에 종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왼쪽부터 화우 신사업그룹의 이광욱(사법연수원 28기) 그룹장, 이근우(35기) 변호사, 정호선(변호사시험 6회) 변호사. / 화우 제공

동시에 마이크론이 1위 업체인 SK하이닉스의 기술 인력을 빼갈 유인이 충분하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HBM 시장 현황과 두 회사 간 기술격차를 재판부에 설명했다. SK하이닉스는 3세대 HBM(HBM2E)부터 기술 난이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진 MR-MUF 공정을 도입해 경쟁사와 차별화 했다. MR-MUF는 반도체 칩을 쌓아 올린 뒤 칩과 칩 사이 회로를 보호하기 위해 액체 형태의 보호재를 공간 사이에 주입하고, 굳히는 공정이다. 이 공정을 통해 칩 두께를 유지하고 용량을 높이면서, 쉽게 휘어지지 않는 견고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마이크론으로서는 이런 기술이 부재한 상황에서 한 자릿수에 불과한 시장점유율을 높여야만 했다. HBM 가격은 일반 D램보다 2~3배 정도 비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고부가가치 상품 수주를 받지 못하고 시장에서 뒤쳐지면 기업은 수익성을 확보할 기회를 잃는다. 화우는 “고부가가치상품인 HBM 없이는 D램 시장에서도 도태될 것이 명확해지는 상황이 되자, 마이크론은 선도업체인 SK하이닉스의 인력을 영입해 기술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재판부에 주장했다. 재판부는 SK하이닉스의 손을 들어줬다.

이 변호사는 “이행강제금 액수는 법원이 재량으로 정한다”라며 “1000만원이라는 금액이 전부 받아들여진 것은 우리나라의 핵심 산업인 반도체 기술 중에서도 최근 가장 중요한 HBM 기술이 외국 회사로 넘어갔다는 주장을 재판부가 고려한 결과”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판결 전에 A씨가 해외에 있는데 이행강제금을 어떻게 집행할 것이냐는 질문도 했다고 한다. 가처분 결과가 기술 유출을 막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될지를 고심했다는 의미다. 이 변호사는 “국내 재산을 압류하거나 가압류할 계획이라고 답했다”고 말했다.

이행강제금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전직금지 가처분이 인용되면, 기업은 집행문 부여소송을 제기해 이행강제금을 청구한다. 이 소송 판결이 난 시점으로부터 10년까지가 이행강제금을 받을 수 있는 기한이다. 다만 중간에 재산 가압류 등을 신청해 소멸시효를 중단할 수 있다. 민사소송과는 별개로 산업기술보호법 및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로 형사 고소를 진행할 수도 있다.

이 변호사는 “이번 가처분 신청은 전 직원 한 명에게 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직금지 약정을 맺고도 경쟁사로 이직하는 행위에 대해 회사가 엄격히 대응하겠다는 방향성을 보여주기 위해 진행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