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화우 최유나 변호사. /법무법인 화우 제공

#A씨는 남자친구와 결혼해 함께 해외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다. 비자를 먼저 발급 받아야 함께 살 수 있었기에 혼인신고부터 했으나, 이후 결혼식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악화해 결별하게 됐다. A씨는 결혼식을 올리기는 커녕 동거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혼을 해야했다.

#B씨는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추진하던 중, “우선 혼인신고부터 해서 마음을 돌리자”는 남자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 B씨는 섣부른 혼인신고를 후회했으나 이혼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A, B씨는 이후 어떻게 됐을까. 이들은 결국 ‘혼인무효 소송’이라는 대안을 만났다. 혼인무효란 말 그대로 혼인 자체를 무효로 만드는 것이다. 혼인신고를 한 적이 전혀 없었던 것과 같은 법적 효력을 지닌다. A, B씨는 사정상 혼인신고부터 해야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교제하다 헤어진’ 것에 불과했기에, 가정법원에 혼인무효 소송을 내 법적 구제를 받을 수 있었다.

법무법인 화우의 최유나(사법연수원 37기) 변호사는 이들을 포함한 총 5쌍의 혼인무효 소송을 승소로 이끈 장본인이다. 그중 2건은 지난 달 결론이 나왔다. 최 변호사는 ‘혼인의사의 합치’와 ‘혼인신고의사의 합치’는 서로 다르다는 논리로 10명에게 새출발할 기회를 제공했다. 지난 16일, 서울 삼성동 법무법인 화우 본사에서 최 변호사를 만나 혼인무효 소송의 뒷얘기와 승소 비결에 대해 들어봤다.

◇ “혼인신고 했다 해서 혼인 의사 있었다고 단정 어려워”

혼인무효는 혼인의사의 합치가 없이 혼인신고가 이뤄졌을 때 가능하다. 소급 적용이 되기 때문에, 소급 효과가 없어 사실상 이혼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혼인취소’와 구별된다.

본래 가정법원은 혼인무효를 굉장히 엄격하게 바라봤다. 그동안 혼인무효로 인정됐던 판례들을 보면, 간병인이 의식불명에 빠진 환자와 몰래 혼인신고를 하는 등 ‘사기 결혼’에 가까운 사례들이 많았다.

최 변호사가 첫 혼인무효 사건을 맡았던 2008년만 해도 가정법원의 엄격한 기조는 여전했다. 의뢰인은 반년 후 결혼하기로 하고 비자 문제 때문에 혼인신고부터 한 상태였는데, 그 당시엔 이런 사례는 혼인무효가 아닌 이혼 소송으로 해결하는 게 최선인 분위기였다. 재판부에서 예비적 청구에 이혼을 추가하라고 권했을 정도다.

최 변호사가 내세운 논리는 ‘혼인의사의 합치’와 ‘혼인신고의사의 합치’가 별개라는 것이었다. 최 변호사는 “쌍방 의사 합치를 통해 혼인신고를 했다고 해서, 이를 반드시 혼인의사의 합치로 볼 수는 없다”며 “이들은 혼인신고를 한 뒤에도 부부로서 산 게 아니라 연인으로서 교제를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혼인의사의 합치는 ‘부부로서 살아간다’는 데 합의하는 것이다. 혼인과 혼인신고는 엄연히 다르다는 게 논리의 전제다.

혼인무효는 사실혼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사실혼은 ‘실체는 부부지만 혼인신고만 하지 않은’ 상태라면, 혼인무효를 주장하는 케이스는 ‘혼인신고가 돼있지만 부부로서의 실체는 없는’ 경우다.

“사실혼 관계를 따져본 사건들에서는 동거 여부와 기간, 결혼식 여부 등 사정이 고려됐는데, 우리는 역으로 이를 혼인무효에 적용했다. 동거와 결혼식 등이 사실혼에서 중요한 요소라면, 반대로 이런 요소가 없을 경우 혼인의 실체가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2009년 승소로 끝난 최 변호사의 첫 혼인무효 사건은 새로운 판례가 됐다. 이 사건 이전까지는 실제 결혼을 앞두고 혼인신고부터 한 연인이 혼인무효를 인정 받은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 결혼 준비 덜 하고 ‘파탄’ 책임소재 따지지 않아야 유리

지난달에는 주택 청약 때문에 혼인신고부터 했던 커플이 혼인무효를 인정 받은 일이 있었다. 의뢰인은 연애한 지 두세달 만에 상대방의 적극적인 설득에 결혼하기로 했고, 아파트 청약을 넣기 위해 혼인신고부터 했다. 의뢰인은 아직 혼인에 대한 확신이 없었음에도 상대방의 주도하에 끌려가듯 법적 부부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곧 ‘결혼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별을 통보했다. 결혼식 날짜도 잡지 않았고 예정된 이벤트도 전혀 없었다. 실질적으로 두 사람은 그저 5~6개월 간 교제하다 헤어진 것과 다름 없는 상태였다. 최 변호사는 두 사람의 연애 기간, 혼인신고가 한쪽의 주도로 이뤄졌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고 재판부는 혼인무효를 허가해줬다.

혼인무효가 인정될 확률을 높이려면 결혼식장 예약 상견례, 웨딩사진 촬영, 예물 주고받기 등 혼인 준비가 덜 이뤄져야 유리하다. 그래야 혼인의사의 합치가 없었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 변호사는 또 혼인신고를 한 당사자 간 상호 간 비방을 하는 등 관계 파탄의 책임을 따질 경우 혼인무효 소송에서 승소하기 어렵다고 조언한다.

“반대하는 부모의 마음을 돌리려고 혼인신고부터 했다가 상대방으로부터 이별 통보와 함께 이혼 소송을 당한 의뢰인이 있었다. 그런데 의뢰인과 상대방 남성이 관계 파탄의 책임 소재를 갖고 서로 다투는 바람에 혼인무효 소송의 본질이 흐려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1심 재판부는 두 사람의 혼인 의사가 없었다고 볼 수 없다며 혼인무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최 변호사는 2심에 가서야 승소할 수 있었다. 3년 동안 재판한 끝에 어렵게 얻어낸 결실이었다.

최 변호사는 “두 사람이 혼인 파탄의 책임을 놓고 ‘나는 열심히 준비했는데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식으로 다투면, 재판부에서는 오히려 이들이 확고한 혼인 의사를 갖고 혼인신고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쪽에서 위자료 등을 청구하는 것도 혼인무효 결정을 받아내는 데 불리하다. 위자료 청구 등이 이뤄지는 순간, 재판부는 귀책 사유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혼인무효를 주장하는 논리가 전체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쌍방이 혼인무효 소송의 취지에 상호 동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혼인무효 판결을 받은 뒤 ‘새로운 인생을 선물해줘서 고맙다’고 하던 의뢰인이 생각난다. 다른 종류의 사건들도 많이 맡고 있지만, 혼인무효 소송의 경우 하나의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특히 뿌듯하고 보람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