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진흥은 문화 상품권 발행을 위해 1997년 만들어진 곳이다. 이 회사는 지난 2021년 8월 지류·온라인 문화상품권 발행·판매 사업을 (주)문화상품권(컬쳐랜드마케팅)에 넘기는 영업 양수도 계약을 체결했다. 상품권 예수금 부채를 (주)문화상품권에 넘겨 부채 비율을 낮추고 재무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머지포인트 사태’의 여파로 금융감독원이 선불전자지급수단업(선불업) 업체들에 전자금융업 등록을 요구한 데 따른 조치였다.

그런데 이듬해인 2022년 4월, 사업을 양도했던 한국문화진흥이 돌연 ‘계약 무효’를 주장하며 영업 양수도 계약 무효 확인을 청구하는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사업권을 사간 (주)문화상품권의 손을 들어줬다. 한국문화진흥이 영업 양수도를 통해 당초 의도했던 목적을 달성한 만큼 계약은 유효하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주)문화상품권은 어떻게 한국문화진흥에 맞서 지류·온라인 문화 상품권 사업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일러스트=손민균

◇ 계약 후 돌연 무효 주장, 法 “목적 달성해 유효”

한국문화진흥은 지류·온라인·모바일 문화 상품권을 발행해 가맹점(판매처)을 통해 소비자에게 판매해왔다. 한국문화진흥이 사업을 돌연 매각한 이유는 부채를 줄여 전자금융업을 등록하기 위해서였다. 2021년 8월 머지포인트가 환불 중단으로 수천억원의 피해를 내며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자, 금감원이 선불 등록 업자 중 전자금융업 등록을 하지 않은 사례가 있는지 조사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한국문화진흥이 택한 방법은 (주)문화상품권에 지류·온라인 문화 상품권 사업을 양도하고 모바일 문화 상품권 사업만 유지하는 것이었다. (주)문화상품권은 한국문화진흥에 있던 직원 일부가 그 무렵 별도로 만든 회사였다. 한국문화진흥은 상품권이 판매되면 상품권 금액만큼 회계상 예수금 부채로 계상하고, 상품권이 회수되는 경우 예수금 부채에서 제외해왔다. 때문에 지류·온라인 문화 상품권 사업을 양도하면 상품권 예수금 부채도 함께 넘길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업 양수도 결과 한국문화진흥은 재무 건전성을 높여 전자금융업 등록을 무사히 마치게 됐다.

그러나 한국문화진흥은 이듬해인 작년 4월 (주)문화상품권을 상대로 돌연 영업 양수도 계약 무효 확인을 구하는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상품권 예수금을 넘기려면 채권자(상품권 소지자)로부터 승낙을 받아야 하는데, 승낙 받지 못했으므로 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상품권 영업을 위해 필요한 판매 데이터 등이 담긴 전산 자산도 넘길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주)문화상품권 입장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주)문화상품권은 상품권 예수금 채권자는 가맹점(판매처)이며, 채무 인수에 대한 묵시적 동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상품권 예수금 채권자를 소비자로 본다 하더라도 사후 승낙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업권 양수는 타당했다고 반박했다. 한국문화진흥이 상품권 예수금 부채를 넘기고 전자금융업을 등록하는 등 계약 목적이 달성된 만큼 계약이 유효하다는 게 (주)문화상품권 측 입장이었다. 결국 (주)문화상품권은 작년 7월 한국문화진흥을 상대로 전산 자산을 이전하라는 반소(反訴)를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0부(재판장 정찬우)는 지난달 본안 소송과 반소에서 (주)문화상품권의 손을 들어줬다. 예수금 채권자를 상품권 소지자로 봐야 한다는 한국문화진흥의 주장은 타당하지만, 한국문화진흥이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계약이 유효하다는 취지였다.

윗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세종 박교선 대표변호사, 서영호·백상현·김우균 변호사. /세종 제공

◇ 회계 공시 찾아 증거로 제출, 영업 침해 막아

이번 사건의 두 가지 쟁점은 ‘채권자의 승낙’과 ‘계약 목적 달성’ 여부였다. 민법 454조는 제3자가 채무를 인수한 경우 채권자의 승낙에 의해 효력이 생긴다고 규정한다. 한국문화진흥을 대리한 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상품권 예수금 채권자가 상품권 소지자이기 때문에 모든 소지자들에게 계약을 승낙 받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주)문화상품권을 대리한 법무법인 세종은 상품권 예수금 채권자는 소지자가 아니라 상품권 가맹점(판매처)이라고 반박했다. 상품권 소지자가 채권자라 할지라도, 상품권 발행처와 가맹점을 통해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하는 상황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하나하나 승낙 받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한국문화진흥이 사업을 양도한 뒤 단순 변심으로 계약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는 게 (주)문화상품권의 입장이었다. 1심 재판부는 상품권 예수금 채권자가 상품권 소지자라는 한국문화진흥의 주장은 인정했으나 양자 간 계약은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법무법인 세종 변호인단은 계약 목적의 달성 여부를 입증하고자 한국문화진흥이 상품권 예수금 부채에 변동이 발생했다고 공시한 내용 등을 직접 찾아 증거로 제출했다. 한국문화진흥이 회계상 부채를 (주)문화상품권에 넘긴 뒤 전자금융업을 등록했으므로 계약 목적이 달성됐다는 취지였다. 한국문화진흥의 예수금 부채는 2020년 말 1709억원에서 2021년 333억원으로 줄었다. 금감원 전자 공시에는 ‘주요 사업 변동 : 당기 중 오프라인과 온라인 상품권 발행 및 판매에 관한 사업권을 양도하며 자산, 부채의 변동이 발생했다’고 적혀 있었다.

박교선(사법연수원 20기) 세종 대표변호사는 “만약 영업 양수도 계약이 무효가 됐다면, 사업이 모래알처럼 없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상품권에 대한 소비자 신뢰를 지켜냈다”고 말했다. 김우균(37기) 변호사는 “계약이 무효가 됐다면 소비자는 구입한 상품권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 가맹점은 상품권을 받고 용역을 제공해도 되는지, 이미 발행한 상품권을 정당하게 유통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주)문화상품권이 상품권 사업을 정상적으로 양수해 고객이 불편에 처하지 않도록 조력했다”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사건을 두고 시장 점유율 경쟁이 ‘집안 싸움’으로 번진 사례로 평가한다. 한국문화진흥의 모바일 상품권과 (주)문화상품권의 온라인 상품권은 구조가 비슷하다. 모바일 상품권은 바코드 이미지를 핸드폰으로 저장하거나 바코드 번호를 온라인에 입력해 포인트로 사용할 수 있고, 온라인 상품권은 상품권 번호를 문자로 받아 온라인에서 사용할 수 있다. 온라인 상품권 점유율이 높아질수록 모바일 상품권 판매가 줄어드는 관계다.

서영호(35기) 변호사는 “영업을 양도해주면 정상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며 “이번 사건은 영업이 침해 당하는 위법 행위를 막았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백상현(변호사시험 3회) 변호사는 “한국문화진흥이 상품권 영업에 필수적인 전산 자산을 이전해주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반소를 통해 전산 자산도 지켜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주)문화상품권은 한국문화진흥을 상대로 작년 4월 업무 방해 금지 가처분 소송을, 작년 5월 독점적 판매 대행권 침해 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두 건은 각각 작년 5월과 6월 조정이 성립됐다. 재판부는 (주)문화상품권이 지류·온라인 상품권에 대한 전산 자산에 접근할 수 있지만 한국문화진흥의 모바일 상품권에 대한 데이터까지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한국문화진흥은 본안 소송에 불복했고, 이 사건은 2심으로 넘어간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