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법정’이 아닌 런던, 파리, 제네바,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비공개로 진행되는 ‘국제중재’(International Arbitration)로 눈을 돌리고 있다. 국제중재는 양측이 상호 신뢰 하에 소송을 하지 않고 제3자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대체적 수단이다. 중재는 소송과 달리 단심제로 이뤄져 비용과 시간이 적게 든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가 신흥 중재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현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우리나라 변호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총 5회에 걸쳐 싱가포르가 국제중재 허브가 된 비결은 무엇인지, 현지에서 발로 뛰고 있는 변호사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들어본다. 우리 국제중재의 현실을 되짚어보고 미래를 조망해본다. [편집자주]

맥스웰 챔버스는 최고 수준의 국제중재 심리 시설을 제공하는 세계 최초의 통합 대체분쟁 해결(ADR) 복합단지다. 사진은 맥스웰 챔버스 1층 안내판. 주요 국제중재 기관들이 입점해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사진=이미호기자

국제중재가 기업 간 국제 거래에서 가장 선호되는 분쟁해결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국제중재의 현실은 미진한 편이다. 심지어 우리 기업 간 분쟁도 대한상사중재원(KCAB International)이 아닌 해외 중재기구에서 해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궁극적으로 KCAB를 법무부 산하 조직이 아닌 별도의 독립기구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물적 인프라 조성과 인재 양성도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법률서비스 분야 국제수지 적자는 6800억원(2018년 기준)에 달한다. 우리 기업들의 분쟁 사건을 외국의 중재센터에서 해결하면서 막대한 국부가 해외로 유출되고 있는 셈이다.

일례로 지난 2015년 현대건설은 두산중공업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 국제상업회의소(ICC)에 중재신청을 했다. 최종 판정이 내려진 2019년 7월까지 중재비용과 항공료 등으로 약 200억원이 지출된 것으로 추산됐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국제중재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시장에 서울의 ‘중립적 이미지 및 인식’을 제고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를테면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의 경우 국가 자체를 홍보하기보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중재하기 좋은 장소’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즉 △비즈니스 시장이 크고 △굵직한 글로벌 기업을 다수 보유하고 있으며 △법 제도 발전 정도가 높고 △문화적 영향력이 강한 국가일수록 국제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는 데 저해 요소가 될 수 있다.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성공가도를 달릴수록, 국제중재 시장에서 ‘중재지’로서의 이미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덜 부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중재협회(AAA)의 국제 담당 부서인 국제분쟁해결센터(ICDR)의 마이클 리(Michael lee) 변호사는 “중국처럼 ‘내 사건 관련은 내 땅에 와서 받아라’ 하지 않는 이상, 진정한 의미의 국제중재 강국이 되려면 역설적으로 아예 힘 없는 나라가 돼야 한다”면서 “국제중재는 이러한 정체성 이슈가 따라다닌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 자체의 위상이나 이미지를 일부러 떨어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국제중재 업무에 최대한 독립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진 왼쪽부터)벤자민 휴즈 교수, 유지연 변호사, 미셸 손넨 SIAC 한국지사 대표, 마이클 리 변호사

유능한 국제중재인이자 서울대 교수인 벤자민 휴즈(Benjamin Hughes) 변호사는 지난달 29일 기자와 만나 “‘KCAB’에서 한국 중재인이, 한국말로, 한국 법원 절차에 따라 사건을 담당하는 국내팀과 달리 외국 중재인이 영어로 국제중재 규칙에 따라 진행하는 국제팀을 분리·독립시켜 전문성을 더욱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국제(international)적인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 ‘KCAB’를 ‘KICAB’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중재를 할 수 있는 ‘국제중재 생태계’를 갖출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벤자민 휴즈 교수는 “한국에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판사가 국제중재 사건만 다루는 법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유능한 중재인과 변호사가 있더라도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판정부부터 만드는 게 생태계 조성의 첫 걸음”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예산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법무부는 중재산업 활성화를 위해 ‘중재산업 진흥 기본계획(2019~2023)’을 수립·운영해왔지만 관련 예산은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연간 15억~37억원 수준이 편성되는 데 그쳤다. 국제중재로 한때 명성을 떨친 홍콩이나 현재 1위 자리를 꿰찬 싱가포르 정부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싱가포르 현지 로펌인 운앤바줄(Oon&Bazul)에서 코리아 프랙티스팀을 이끌고 있는 유지연 파트너 변호사는 “국제중재는 싱가포르 정부에겐 하나의 산업 및 법률 시장일 뿐 아니라 국가 브랜드 그 자체”라며 “앞으로 국제중재의 전망이 밝은 만큼 우리 정부의 애정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제중재 경험을 축적하고 전문가 양성 노력도 필요하다.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는 한국 시장 변화와 그에 따른 법률적 수요를 파악하기 위해 2016년 서울에 사무소를 냈다. SIAC과 같은 통로를 활용해 국제 수준에 맞는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셸 박 손넨(Michele Park Sonen) SIAC 동북아 사무소 대표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기업 및 투자자를 상대로 웨비나를 개최해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국제중재 관계자들과 중재 경험을 공유하고 실무적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