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철학자 한병철. 최근 디지털화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과정을 논증한 책 ‘정보의 지배’를 출간했다./사진=채승우 기자

‘규율 체제에서와 달리 정보 체제에서는 몸과 에너지가 아니라 정보와 데이터가 착취된다… 정보 자본주의는 감시자본주의로 발전하고 사람들은 데이터 가축이자 소비 가축으로 격하된다.’

‘정보는 흥분을 먹고 살고 가속 강박을 일으켜 인지 시스템과 지각을 파편화하기에 민주주의에서 필요한 공론과 담론, 경청과 반론을 제거한다’

‘진실은 정보의 옮음과 맞음 그 이상이다…오늘날 우리는 정보를 잘 갖췄지만 방향 설정이 없다. 정보는 방향 설정력이 없다.’

-한병철의 책 ‘정보의 지배’ 중에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을 만났다. ‘피로 사회’라는 정확한 진단명으로, 그가 이 세계에 충격파를 일으킨 지도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한병철은 계속 ‘진단과 명명의 철학’을 이어왔다.

독일어로 사유한 책은 한국어 번역을 거쳐 계속 세상에 나왔다. ‘리추얼의 종말’ ‘사물의 소멸’ ‘정보의 지배’ 등등. 100페이지 분량의 짧은 문고본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통렬한 산문시처럼 읽힌다. 한병철의 문장은 당대의 철학자가 일상의 환부에 꽂을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칼이다.

그 자신, ‘나의 문장에는 살이 없고 뼈만 있다’고 했다. 군더더기를 제거한 현대적인 문장은 그 진실함과 명징함으로, 더 급진적이고 클래식해진다.

예컨대 새 책 ‘정보의 지배’에서 ‘밈은 미디어 바이러스로 잦은 흥분을 일으켜 담론을 파괴한다’ ‘강렬한 정보 도취가 존재의 윤곽을 흐릿하게 만든다’는 문장들에, 나는 오래 머물렀다. 감시당하고 가축이 되는 과정이 너무나 매끄러워 너도나도 ‘좋아요! 좋아요!’ 디지털 아멘만 외치고 있다고 한병철은 경고했다.

▲한병철은 10년 동안 정교한 언어로 설계된 100페이지 분량의 짧은 철학 에세이를 출간해왔다. 그는 철학자를 마술사, 시인이라 칭했다./사진=채승우 기자

정보 가축, 소비 가축이라는 명명이 몸을 반으로 쪼개듯 명징하게 다가왔다.

22살에 독일로 떠난 그는 어머니와 통화할 때만 한국어를 쓴다고 했다. 서툴러도 우회하지 않는 시니컬한 한국어에서 독특한 물성이 느껴졌다. 바야흐로 바깥에서 보는 자들, 스스로를 추방한 경계인들의 시대가 열린 듯했다.

-여기 있어도 저기를 보는 눈빛이 참으로 이방인다우시군요. 시인 김수영의 눈빛처럼, 외모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압도적입니다.

“제가 다르게 생겼죠? 오래 독일에 살다 보니… 한국인들은 다르면 무섭게 느껴요. 그래선지 머리도 검은색에, 표정도 점점 비슷해지죠. 타자들은 서양에 더 많아요. 더 다양한 타자가 수용됐죠.”

-서구의 저널리스트나 소설가는 외모를 묘사하는 문장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체구, 표정, 눈빛, 낯빛… 낯섦을 새로움으로 인지하니, 묘사가 풍성해져요.

“반면 한국은 낯섦을 표면화하지 못하고 소외시키죠. 비슷해서 편한 것 같지만, 획일성의 지옥에서 서로 비교하며 더 고통받아요. 신기한 건 서로 평가하면서 더 똑같아진다는 거죠. 어근이 그렇습니다. 비교할수록 같아져요.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 ‘아노말리사’를 보면 아이도 어른도 다 똑같이 생겼어요. 얼굴도 목소리도 똑같은 인형들이죠.”

자본주의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들고 있다고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들 돈처럼 생겼어요.”

-사람이 돈처럼 생겼다고요?

“돈이 얼굴이 없잖아요.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자기 얼굴이 없어요. 너도나도 돈처럼 빵처럼 변해요. 독일도 점점 그렇게 변하니 걱정이에요. 생각하는 사람, 타자가 없어요. 다른 얼굴도 사유도 희귀해져요. AI처럼 계산만 추앙하고 사고를 안 하니까… 사실 난 인터뷰를 잘 안 해요. 기자들도 얼마나 게으릅니까… 책에 있는 내용을 나한테 물어보죠. 그건 똑똑한 책한테 물어봐야지, 왜 바보인 저자에게 물어봅니까. 나는 내가 쓴 책보다 멍청해요.”

▲“민주주의는 느리고, 호흡이 길고, 지루합니다. 정보의 바이러스적 확산 곧 ‘인포데믹’은 민주주의적 과정을 심하게 훼손하지요.”/사진=채승우 기자

그 자신, 사고자로서 움직이는 언어를 따라갈 뿐이라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책보다 덜 똑똑해도 독자는 여기서 발화된 말을 선호합니다. 허술해도 친밀하니까요. 어쨌든 한병철 선생의 언어는 칼 같고 시 같습니다. 빵 같진 않아요. 본인은 뭐라고 생각하고 씁니까?

“저는 시라고 생각하며 씁니다. 때론 제가 보석을 깎는 세공사처럼 느껴져요. 제 문장에는 살이 없어요. 뼈만 있죠. 뼈만 있으니 거기에 칼이 있고 살(殺)이 들어 있죠. 사실 저는 한자를 선호합니다. 한글만으로 철학 하기 어려워요. 한자를 포기하면 깊은 사고를 품은 언어가 불가능해요. 한글만으로는 개념 설계가 안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일본은 한자를 포기하지 않아서 언어의 힘이 살아있는 것 같아요.”

-독일말은 철학으로 숙성된 개념어들이 많지요. 이번에 쓰신 ‘정보의 지배’에서 정보를 아주 격렬하게 난도질하셨습니다. 정보가 슈퍼빌런이더군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정보는 인식과 사고를 파편화시켰어요. 사고는 머물러야 싹트는데, 정보의 시간성은 순간이죠. 휘발입니다. 민주주의의 시간은 지속인데, 인포크라시는 순간성이니 서로를 밀어내요. 담론이 아닌 정보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은 충동을 따라갑니다. 정보 사회는 충동의 사회라서, 떼를 지어서 떠다니는 정보만 쫓아다녀요. 머무르지 못하니, 정보 자본주의의 생산성은 한없이 높아지죠.”

-현대인은 정보를 먹으며 사육당하는 가축이라 칭했습니다. 저는 영화 ‘매트릭스’와 ‘옥자’의 비주얼이 머릿속에 동시에 소환됐습니다. 그걸 자각이라 할지, 각성이라 할지…

“(눈을 빛내며)그저 가축입니다.”

-가축이 만든 챗GPT는 써보셨는지요?

“(코웃음을 치며)바보 같은 놈, 바보지 뭐예요. 앵무새처럼 누가 한 말을 반복이나 하고 있으니… 챗GPT는 과대평가 된 장난감일 뿐이에요. ‘내가 철학은 마술이다’라고 했더니 AI가 그래요. “아닙니다. 철학은 학문입니다.” 언어 편집기는 흉내 잘 내는 계산기에 불과합니다. 생각은 달라요. 생각은 없는 것을 창조하는 행위입니다.”

독일에서 오래 거류했던 한병철은 인터뷰 중 한국말로 표현되지 않는 어휘를 스마트폰의 통역기를 써서 찾아냈다. 간간이 동문서답하는 AI를 바보라고 놀리며 흥분했다. 순도 높은 언어를 쓰는 정밀한 철학자이자, 동시에 감정의 높낮이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모습이 신선했다. 디오게네스나 소크라테스 같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처럼, 연극적인 분방함이 넘쳤다.

▲항의도 하고 반란도 일으키는 군중에 비해, 가축은 울타리를 넘지 않고 그 안에서 평화로워한다./픽사베이이

-21세기의 위대한 시민들이 어쩌다 가축의 몸을 견디고 있는 걸까요?

“가축은 압박을 받지 않아요. 정보의 먹이를 받아먹으며 쾌락을 느끼죠. 억압이 있으면 저항이 생기고 노예 반란이 일어나겠죠. 가축은 가축이 되면서 스스로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해요. 완벽한 지배죠. 완벽한 신자유주의예요.”

정보화와 신자유주가 만나 ‘정보 자본주의’가 탄생했다고 했다.

“사육은 무리의 욕구를 만족시켜서 고기를 생산하는 게 목적이죠. 정보 자본주의 시대는 지배하는 사람도, 지배자도 없어요. 항의도 하고 반란도 일으키는 군중에 비해, 가축은 울타리를 넘지 않고 그 안에서 평화로워요. 울타리밖에는 정보의 밥이 없으니까요.”

-충격적인데 시적이군요!

“철학자는 시인이라고 했잖습니까.”

-최근에 인터뷰했던 제러미 리프킨은 자신을 학자가 아닌 활동가라고 소개하더군요. 개인의 소유가 아닌 공동의 이야기를 운 좋게 겪은 사람 중 한 명일 뿐이라고요.

“글쎄요. 그분은 표면만 관측하는 활동가이니 깊이 있는 사고로 나아가기 힘들 겁니다. 행동은 하는 것이지만 시는 되는 것이지요. 시가 되기 위해 저는 피아노를 칩니다.”

리듬을 타듯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실내에 있는 피아노를 가리켰다. 작은 피아노는 마지막 울림의 여운을 간직한 채 숨을 고르는 듯했다.

-철학자가 피아노는 왜…?

“(반색하며)더러워지지 않기 위해 피아노를 칩니다. 더러움이 쌓이면 좋은 생각을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피아노를 치는 행위는 저에게 청소의 리추얼입니다. 마음을 청소하기 위해 슈만을 치지요. 내 마음의 음악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요. 제 사고는 음악에서 나옵니다. 강의할 때 피아노를 가져다 놓으라고 해요. 바흐, 슈만, 라흐마니노프를 치면서 내 책을 읽는 콘서트도 합니다. 피아노를 치면서 내 사고의 음악성, 음조를 함께 느끼는 거죠.”

몸이 중요하다고 했다. 음악도 사고도 몸과 감정이 있어야 하는데, 육체 없는 AI가 무엇을 하겠느냐고.

60대 재독 철학자의 마른 탄식이 실내에 음조가 되어 출렁거렸다.

▲22살부터 독일어로 철학한 그는 ‘피로 사회’ 이후 유럽을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사진=채승우 기자.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어요. 사랑이 있고 희망이 있어야 없는 것을 본다고. 희망이 없으면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죠. 기계는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계산을 잘하는 기계는 그 영리함으로 인간을 지배할 수는 있어요. 망치로 집을 지을 수도 있지만, 망치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죠. 도구가 흉기가 되는 거예요. (스마트폰을 들어 올리며)저는 이걸 산책할 때 꽃 이름 물어볼 때나 써요. 안 그러면 내가 스마트폰의 도구가 되겠지요.”

-(한숨을 쉬며)하지만… 저 자신, 소비 가축, 정보 가축에서 정말 해방되고 싶은지조차 모르겠습니다.

“그건 나도 모르죠. 가축우리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지, 나는 몰라요. 나는 비관론자도 낙관론자도 아닙니다. 진지한 사고는 비관도 낙관도 아니에요. 구원이죠.”

-구원이요?

“(미소 지으며)네. 철학은 마술입니다. 설득이 아니라 유혹이죠. 플라톤의 ‘향연’에 보면 알키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일컬어 악기 없이 젊은이를 유혹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사르트르는 철학자를 피리를 불어 유혹하는 마르시아스라고 명명해요. 유혹할 수 있는 힘이 있기에 철학은 마술이고 상상력입니다. 챗GPT가 철학을 학문이라 주장하는 한, AI는 장난감이에요. 하지만 그 장난감이, 계산기가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어요. 무서운 일입니다.”

-어떤 점이 무서운가요?

“작은 카메라는 눈과 섞여요. 사람들은 눈 오면 좋아하지만, 전 세계에 카메라가 깔리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살면서 관찰당하며 살죠.”

-최근에 영화 ‘서치2′를 봤어요. 나의 동선이 거리의 라이브캠을 통해 생중계되더군요. 마침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를 섞어놓은 것 같은 디지털 제국이 탄생한 것일까요.

“(물끄러미 쳐다보며)지배당하는데 자유롭다고 느끼니 문제죠. ‘좋아요’의 지배가 완벽한 지배예요. 그게 정보의 지배입니다. 예술가 제니 홀저의 말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달라”고 애원하게 만드는…”

▲정보 소음 속에서 진실을 말할 용기를 내지 않으면 진실은 지날 날의 에피소드로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하는 명징한 책 ‘정보의 지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쓴 미국의 예술가 제니 오델은 디지털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장미 정원을 산책하고 까마귀를 이웃으로 사귀라고 권하더군요. 내 몸이 움직이는 구체적인 장소성을 찾으라고. 더 이상 SNS 기업에 관심을 착취당하지 말라고요.

“그 또한 치유의 수준입니다. 혜민 스님이 주도했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연장선이죠. 치유를 넘어서 구원으로 가려면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대 아테네의 권위자들은 젊은이들에게 다른 삶을 살 것을 부추기는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나는 선동을 두려워하지 않는 괴짜 철학자 한병철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생각은 없고 처리만 잘하는 빅데이터 사회에서 ‘철학자는 참되게 말하는 급진적 저널리스트’라고 했습니다. 선생이 보기에, 누가 그런 철학자인가요?

“글쎄요. 대학에는 기존의 철학 지식을 관리하는 공무원들만 있더군요. 철학 공무원보다는 저널리스트가 낫습니다. 저널리스트가 되기 전에 먼저 시인이 되길 권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시인은 파울 첼란입니다. 시는 다른 세계, 타자에 대한 동경을 바탕으로 해요. 시인이 없으면 ‘있는 걸’ 반복할 뿐이죠.”

-선생의 철학 이론도 반복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놀라며)반복이라니요? 저는 변주합니다. ‘사물의 소멸’ ‘리추얼의 종말’ ‘땅의 예찬’ ‘투명 사회’ ‘타자의 추방’... 음악처럼, 하나의 이론을 세우고 여러 가지 테마로 변주하면서 연주하는 거죠. 밀도와 깊이와 색깔과 무늬가 다른 융단을 짠다고 보는 게 어떨지요.”

-이를테면…

“이를테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처럼. 나의 사고의 변주가 25권의 악보로 나왔죠. 피상적으로 읽으면 반복이겠으나, (힘을 줘서)그것은 변주입니다.”

▲조임과 풀림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한병철의 비전형적인 얼굴./사진=채승우 기자.

-어쨌든 ‘시대마다 질병이 있다’로 시작하는 ‘피로 사회’로 선생은 2010년 이후로 유럽을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가 됐습니다. 이후에 당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저는 변함없이 피아노를 치고 제 생각의 음조를 따라갑니다. 신문을 읽고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관찰하죠.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머리를 박고 걷는 사람들을 보며 ‘더 빠르게 가축이 되어가는구나!’ 탄식하면서. 사회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바깥에 동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게 쉽지 않아요. 사회 안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세서...”

-인사이더가 되기를 거부하시는군요.

“아시다시피 사회의 일원이 되면 깊은 사고를 하기 힘들어요. 밖에 있어야, 외롭고 추방당한 타자가 되어야, 철학이 지속됩니다.”

-누구의 영향을 받으셨나요?

“죽은 사람한테 받았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안아주고 싶어요. 한나 아렌트는 시선이 달라도 계속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대화하고 싶은 살아 있는 사람은 아쉽게도 아무도 없습니다. 자크 데리다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그와 서신도 교환하고 함께 하이데거(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의 오두막에도 가보았죠.”

대화를 나누는 내내 저항의 힘을 잃은 철학 공무원들에 대한 반감을 감추지 않았다. 한병철의 언어가 적힌 나의 인터뷰 노트에는 크레셴도와 격앙된 쉼표가 가득했다.

-화제를 바꿔보죠. 최근에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는 연설문을 책으로 내기도 했어요. 그가 서구에 보내는 SNS 메시지가 대중을 설득하면서 영토 분쟁 성격의 국지전이 3차 대전 혹은 가치의 전쟁으로 지위를 얻었다고 평가됐죠. ‘필요한 것은 탈 것이 아니라 탄약이다’라는 라는 문장과 함께. 민주주의의 위기를 만들어낸 대표적 인물로 트위터 대통령 트럼프가 있는데요. 철학자로서 두 사람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제가 보는 젤렌스키는 뛰어난 배우입니다. 대작 영화에서 좋은 배역을 맡았습니다. 트럼프와 비교하면 두 사람 다 TV 출신이고 좋은 영화와 각본을 찾아다닙니다. 젤렌스키는 전쟁 중에 노동자에게 해로운 법안을 통과시켰고, 부패 문제도 거론됐어요. 제 시선에서는 젤렌스키도 정치가로서 믿음이 가지 않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전쟁은 현실인데, 현실에서 배우 역할을 하는 모호한 인물이지요.”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가들은 어떻습니까?

“독일에 있어서 잘 모릅니다. 지금도 몸싸움하고 소리 지르고 싸우나요? 끝까지 말로 설득하는 게 민주주의입니다. 끝까지 듣고 말하는 게 민주주의예요.”

-대의 민주주의가 무용하며 한계에 다다랐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의 민주주의는 인내도 경청도 담론도 없어요. SNS 정치가 모욕과 자극으로 시간을 파편화시켰어요. 민주주의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제도예요. 공론과 담론은 단번에 무르익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해요. 트위터가 정치를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과거 링컨은 3시간을 연설했고, 상대 진영의 반론에 또 1시간을 연설했어요. 그걸 시민들이 참을성 있게 들었어요.”

▲링컨은 연설로 민주주의의 황금기를 이뤄냈다. 3시간 씩 말하는 건 다반사였다.

-요즘은 정치가도 기업가도 트위터로 싸우죠. 아무도 참지 않아요.

“담론은 없고 모욕의 파편만 사방에 튀죠. 정치가 파괴되는 걸 막으려면 트위터부터 없애야 합니다.”

정보의 지배를 멈추려면 정치가들이 하루빨리 법안을 만들어야 하는데, 괴테도 셰익스피어도 읽지 않은 갈등 산업의 신도가 되어 욕설만 퍼뜨린다고 한심해했다. 소셜미디어의 자아 숭배, 자기 중심성은 극에 달했다고.

“기계와 대적할 수 있는 자들이 사회를 생각하며 다른 삶을 꿈꿔야 해요. 똑똑한 기계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삶을 창조할 수는 없어요.”

-계속 말씀하시는 다른 삶이란 게 뭔가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이죠. 육체노동, 단순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AI를 만들었어요. 하지만 다시 역으로 정보의 지배를 받고 있지요.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면 순식간에 지배를 당합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한 것이 우리를 다시 억압하는 이 모순은 언제까지 반복될까. 정보를 먹고 정보에 길들여진 온순한 생물로, 디지털 울타리에서 데이터라는 고기를 생산하는 인간의 삶은, 불행일까, 행복일까.

▲한병철은 정보를 때려 넣지 말고, 차라리 백치가 될 것을 주문한다.

-꿈꾸는 인간, 자유로운 인간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백치가 돼야죠. 있는 것을 없애야 새것이 창조됩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찾으면 지나치게 똑똑해집니다. 백치가 되어야 해요. 전부 똑똑하면 전부 똑같아져요.”

-하지만 정보사회에서 백치가 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

“머물러야죠. 정보 자본주의 사회에서 머무른다는 것은 각오가 필요해요. 굶어 죽고 추방당할 각오로 머물러야 합니다.”

-선생이 ‘피로 사회’로 세계를 명명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성과주의적인 신경증과 가속도는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 책 ‘피로 사회’는 한국에서 10만 권이 팔렸어요. 브라질에선 100만 권이 팔렸죠. 싼값에 복사되고 해적판도 많아요. 유감스럽게도 제 책은 노르웨이, 스웨덴 같은 선진국에선 읽히지 않아요. 그곳은 이미 가축화가 진행되어 불만이 없어요. 제 책은 가난한 나라에서 팔립니다. 가난한 나라에 저항이 살아있어요. 희망이 있죠.”

비슷하게 매끈한 매너를 보여주는 나이스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내던 나는, 분노와 성찰이 뒤섞인 그의 이질적인 태도와 다혈질적인 화법에 생동감을 느꼈다. 나는 이 급진적인 저널리스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목구비의 선은 부드러운데, 눈매와 눈동자가 유독 깊고 짙어 음영이 생겼다.

카프카의 문장을 빌어 지금 세계는 ‘동물이 주인의 채찍을 뺏어서 스스로 주인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상황’이라는 설명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나를 채찍질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반복 재생됐다. 그가 쓴 문장만큼이나 그의 이야기는 자력이 강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 시대의 소크라테스가 되려는 것인지 물어보았다.

“저는 그저 책이라는 지팡이를 든 마법사이고자 합니다. 자본주의의 인력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정보의 지배자가 자기 크리틱을 수용하면, 비판자조차 그 포옹의 힘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요. 타자로 남을 수가 없어요. 타자로 남는다는 것은 지치지 않고 각성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계속 서로의 타자로 남아야 해요.”

-정보와 지혜의 싸움은 계속될까요?

“예수가 그랬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정보는 그 반대입니다. 길이 되는 정보가 어디 있습니까? 정보는 자족하고 사라져요. 정보 자본주의에는 진리도 없고 삶도 없고 길도 없어요. 거기서 길을 찾지 마세요. 삶을 가리키고 길을 인도해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숫자는 방향을 가리킬 수 없다.

‘정보나 데이터는 독자적으로 세계를 환히 밝히지 못한다. 이것들의 본질은 투명성이다. 밝음과 어둠은 정보의 속성이 아니다. 밝음과 어두움은 선과 악, 또는 진실과 거짓처럼 서사적 공간 안에서 발생한다.

진실은 이야기의 성격을 띤다… 빅데이터는 장대한 이야기와 대립한다… 셀 수 있는 것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질서에 속한다.’-한병철의 ‘정보의 지배’ 중에서.

“디지털은 모든 걸 숫자화해요. 숫자로 바꾸면 이야기가 사라지죠. 이야기를 해야 길이 보이고 삶이 생기는데 말입니다. 진리는 이야기인데 정보는 이야기를 못 하고 돈만 세지요. ‘스토리텔링’도 엄밀히 말하면 ‘스토리셀링’입니다. 자본주의를 먹여 살리는 이야기만 찾아다니니까요.”

-선생은 영화 ‘매트릭스’의 구원자 네오가 되려 하는군요!

“하하. 제 이름은 병철입니다. 밝은 빛이라는 뜻이죠. 어둠을 쫓아내고자 하니, 이름자를 따라가고 있어요. 철학자는 다른 삶을 프레젠테이션 하는 존재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구원의 언어를 들고서…”

-22살에 금속공학을 전공했던 청년은 어떻게 독일에 가서 철학자가 되었나요?

“(미소 지으며)금속공학이 곧 ‘철학’입니다. 저는 공대를 좋아해요. 그러나 인생이 유한하니 좋아하는 것보다 의미 있는 걸 하기로 했어요. 의미 있는 걸 하는 게, 사실 어려워요. 하지만 도취하다 끝나기에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해요. 모두가 자기 인생의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계산하는 사람, 생산하는 사람으로만 살면 똑같은 시간만 반복해서 살 거라고요.”

▲언어를 향한 동경이 구원을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한병철./사진=채승우 기자.

구원은 언어에 대한 동경이 있을 때 일어나기에, 한병철은 지금도 마법사의 지팡이로 사람들의 머리를 때리고 다닌다고 했다. 정신 차리라고. ‘너는 정보의 바다에 용해되어 디지털 찌꺼기가 되어 사라질 운명이 아니라’고. ‘기본 소득과 컴퓨터 게임만 있는 미래를 거부하라’고. ‘백치가 되고 타자가 돼라’고. 그가 안내하는 디지털 경계지 바깥의 세계는 어떤 곳일까. 정원을 가꾸고 피아노를 친다는 한병철의 손안에 또 하나의 세계가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