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개미(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국내 투자자)들이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이후 한 주 동안 미국 은행 관련 주식과 상장주식펀드(ETF), 상장지수증권(ETN) 등에 1억달러 가까운 돈을 베팅한 것으로 나타났다. SVB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급격한 긴축 영향으로 지난 10일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을 이겨내지 못하고 파산했다.

SVB 파산에 이어 167년의 역사를 가진 투자은행(IB) 크레디트스위스(CS)가 스위스 최대 금융기관 UBS에 인수되는 등 금융권 위기가 확산했지만, 은행주 주가가 과도하게 떨어졌다는 판단에 매수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그래픽=손민균

23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서학개미들은 SVB 사태가 발생한 지난 10일부터 17일까지 퍼스트 리퍼블릭 은행을 5628만달러(약 735억원) 순매수했다. 이는 서학개미들의 인기 종목인 미국 전기차 기업 테슬라 순매수 금액(1548달러)의 3배가 넘는 금액이다.

서학개미들은 3배 레버리지(차입 효과) 상품에도 베팅했다. 미국 주요 은행 10곳을 주가 수익률 3배로 추종하는 ETN을 201억원어치 사들였고, 다우존스 지역은행 지수와 러셀 1000 금융 서비스 지수를 3배로 추종하는 ETF를 각각 130억원, 80억원씩 순매수했다.

이밖에 개별 종목으로는 팩웨스트 뱅코프(185억원), 뱅크오브아메리카(128억원), 웨스턴 얼라이언스 뱅코프(58억원), 크레디트스위스(33억원)를 사들였다.

SVB 사태가 터지기 직전까지 한 달간 서학개미들은 만기 20년 이상 미국 국채 수익률을 3배로 추종하는 ETF를 가장 많이 사들였다. 하지만 사태 직후 한 주간 해당 ETF 순매수 순위는 10위로 밀려났다. 나스닥 지수를 3배로 추종하는 TQQQ의 경우도 2위에서 50위권 밖으로 사라졌다. 순매수 3위와 4위를 기록했던 구글 모회사 알파벳과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 3배 레버리지 ETF 역시 5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순매수 상위 5위에 머물렀던 미국 배당 성장주에 투자하는 ETF 역시 26위까지 내려갔다.

서학개미들이 미국 은행주 관련 상품에 몰려든 이유는 SVB 사태로 촉발된 금융권 위기가 지속되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증권가에서는 이번 사태가 2008년 금융위기와 같은 시스템 위기로는 번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유동성 위기로 파산 위기에 빠졌던 CS 역시 UBS에 인수되며 위기가 일단락됐다.

서학개미들의 베팅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21일(현지 시각)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이 지역 중소은행들의 위기 사태가 다시 악화하면 추가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나서면서 미국 은행주 주가는 급등했다. 퍼스트리퍼블릭 은행은 하루 만에 29.47% 폭등했고, 팩웨스트뱅코프와 뱅크오브아메리카 역시 같은 날 각각 18.77%, 3.03% 상승했다. 다만 이튿날 옐런 장관이 상원 은행위원회에 출석해 재무부가 현재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의 은행 예금 전액을 보장하도록 예금보험을 확대하는 방안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히면서 은행주는 상승 폭의 대부분 반납했다.

증권가에서는 금융 불안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만큼 은행주를 중심으로 변동성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김인식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변동성에 대한 우려감은 여전히 지속될 수 있는 환경”이라며 “미국 지방은행과 관련해 높은 변동성을 띠는 구간인 만큼 리스크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UBS가 CS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CS의 AT1 채권이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되면서 채권 시장 불안은 남아있다는 평가다. 앞서 스위스 금융감독청(FINMA)은 170억달러(약22조2000억원) 규모의 CS AT1 채권을 상각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도이치방크와 바클레이스, UBS, HSBC 등 주요 유럽 은행들의 AT1 채권 가격은 함께 떨어졌다.

AT1은 코코본드(조건부 전환 사채)의 일종으로 유사시 상각되거나 주식으로 전환된다. 은행 입장에선 자본구조가 취약할 때 채권을 주식으로 바꿔 부채를 탕감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투자자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높지만 원금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 결정으로 채권자가 주주보다 우선이라는 시장 믿음이 깨지면서 ‘본드런’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코코본드 수요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조병현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CS 코코본드를 많이 가지고 있는 은행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시중은행 가운데 코코본드 발행 비중이 높은 은행 주가는 낙폭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