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인 긴축 기조에 벤처투자 시장 역시 얼어붙자 기업형 벤처캐피털(CVC)로의 이직을 고심하는 투자 심사역들이 늘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대기업 등을 떠나 고액의 성과보수를 기대해 벤처캐피털(VC)에 이직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올해 들어 분위기가 급반전된 것이다.

CVC는 일반 VC보다 성과보수가 적게 설정돼 ‘대박’을 노릴 만한 곳은 아니라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지주사 CVC는 자금 조달이 용이하고, 성과에 대한 압박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투자 시장 한파에 중소형 VC들이 대거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우려도 이 같은 흐름에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그래픽=손민균

10일 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지주사 CVC의 심사역 채용에 중소 VC출신 심사역들이 대거 지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CVC는 협업 기업 발굴 및 신시장 개척 등 전략적 목적을 갖고 금융기관이 아닌 일반기업이 출자해 설립한 벤처캐피탈을 말한다.

심사역들이 CVC행을 고민하는 이유는 최근 벤처투자 업계 자금줄이 말라가면서 투자를 집행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출자자(LP)로부터 돈을 받기 어려워진 환경이라 트랙 레코드(운용을 맡았던 펀드들의 투자 수익률 기록)를 쌓아야 하는 심사역 입장에선 투자하기 수월한 환경을 찾아 나가는 것이다.

VC업계 한 임원은 “투자를 통해 포트폴리오를 쌓아 나가야 하는 심사역 입장에서 투자 시장이 얼어붙는 건 개인 커리어 관점에서 부정적”이라며 “업계가 좁아 CVC에 지원한 사실이 드러날 위험이 있음에도 지원한 건 그런 배경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지주사 산하 CVC는 자금 조달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고, 대기업 계열사인 만큼 브랜드를 앞세워 투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부 지주사의 경우 자사 CVC 육성을 위해 경쟁사에는 일절 자금을 내놓지 않는 경우도 있다. 현행법상 지주사 산하 CVC는 40%까지만 외부 자금을 유치할 수 있다.

또 성과보수를 일반 VC처럼 높게 설정할 수 없는 만큼 성과에 대한 압박 역시 상대적으로 덜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VC업계 또 다른 임원은 “큰 그룹사 안에 속하는 심사역의 경우 일반 직원들과 크게 다르게 연봉을 책정하긴 어렵다”며 “모회사 브랜드를 가지고 투자하기 때문에 개별 심사역의 피로도가 덜 하다는 장점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은 최근 지주사 CVC가 외연을 넓히며 인재 채용에 적극적으로 나선 점과도 맞물린 것으로 풀이된다. 과거 일반 지주사의 경우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CVC 설립이 불가했다. 하지만 벤처투자 활성화를 위해 공정거래법이 개정되면서 지난해 말부터 지주사도 CVC를 100% 완전 자회사로 둘 수 있게 됐다.

동원 그룹은 올해 3월 처음 지주사 CVC인 동원기술투자를 설립했고, GS그룹도 GS벤처스도 지난 7월 1300억원 규모 펀드 결성을 마치며 외연을 넓히고 있다. 효성그룹 역시 지난 9월 효성벤처스를 출범시켰다. 그간 대기업은 지주회사에 편입되지 않은 계열사나 해외법인 등의 형태로 벤처캐피탈을 설립해왔다.

민간은 물론 정부도 CVC 활성화에 나서는 모습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달 800억원 규모의 첫 CVC펀드를 결성을 앞두고 있다. 산업부는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을 통해 운용사 2곳을 선정해 각 200억원씩 출자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