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대제(70·사진)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많다. 1980년대 IBM왓슨연구소를 박차고 나와 조국을 반도체 강국으로 발돋움 시켜 ‘미스터 반도체’로 불렸고, ‘35세 상무’, ‘준(准)천재급 인재’라는 영예로운 타이틀도 얻었다. 2000년대 초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직을 맡아 ‘참여정부 최장수 장관’으로 봉직했다. 그 과정에서 스톡옵션 80억원어치를 포기한 일화는 잘 알려졌다.

삼성전자(005930) 사장직을 내려놓고 업계를 떠난 지 어느 덧 20여년이 지났지만, 진 회장은 여전히 한국 반도체 산업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 받는다. 그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16메가, 256메가 디램(DRAM)은 오늘날의 삼성 반도체를 있게 한 밑거름이다.

최근 서울 양재동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본사에서 진 회장을 만났다. 그는 현역 시절 얻은 수식어들에 어울리게 지금도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와 과제에 대해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진 회장은 우리 반도체 기업들이 강점을 갖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개발에 계속 집중하되, 비메모리 반도체 후(後) 공정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한 산학연 협력에 정부가 발 벗고 나서야 하며, 미·일·대만 반도체 동맹에도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이 조선비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으나, 시스템 반도체는 여전히 난공불락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산업 시장 규모가 5000억 달러를 돌파했고, 비메모리 반도체가 그 중 4분의 3을 차지한다. 그러나 현재 전세계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2~3%에 불과하다. 메모리 반도체는 설계 인력이 100~200명만 있어도 되지만, 비메모리 반도체는 1000명을 넘어 1만명의 인력을 필요로 한다. 그만큼 많은 인력이 투입돼야만 앞서나갈 수 있는 영역이다.

현 시점에서 온 나라가 뛰어든다 해도 시스템 반도체 영역에서 우리 기업이 퀄컴이나 엔비디아를 뛰어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인력이 다 덤벼도 마이크로소프트(MS) 하나를 못 이기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 기업이 압도적으로 잘하는 영역이 있지 않나? 바로 메모리 반도체다. 중국이 메모리 반도체를 잘해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아직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000660)를 따라잡지 못했다. 중국 전체가 달려들어도 우리나라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을 못 이기고 있다.”

-중국이 메모리 반도체 산업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삼성전자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실제로 낸드플래시는 한·중 간 기술 격차가 2년 밖에 안된다는 얘기도 있다.

“6~7년 전부터 중국 정부가 나서서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해왔다. 메모리 중에서도 플래시 메모리는 한국 기업을 따라잡기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디램은 더 어렵겠지만, 그 역시 언젠가는 쫓아올 수 있다. 우리 기업이 굉장히 노력해서 격차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금방 따라잡힐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도 5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기업이 압도적으로 앞서갔지만 지금은 거의 따라잡히지 않았나. 영영 따라잡히지 않는 산업이란 없다.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영역을 끊임 없이 찾아내야 한다.”

-우리 기업이 개척해야 할 새로운 영역이 무엇일까. 팹리스(설계)나 파운드리(위탁생산)에서 점유율을 높여야 할까.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에 과감하게 투자한다면 메모리, 비메모리를 합쳐 1등 반도체 기업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실제로 세계 1위 회사 인텔을 이긴 적도 있다. 그러나 파운드리를 잘하는 것이 과연 삼성에 이득만 될 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퀄컴이나 엔비디아 같은 기존 고객사들을 경쟁자로 돌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팹리스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 역시 실효성이 떨어진다. 현재 중국에는 팹리스 기업 2000~3000개가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50~60개밖에 없다. 중국은 세계 최대 전자 제품 조립 시장인데, 여기에 들어가는 비메모리 시스템 집적회로(IC)들을 현지에서 조달한다. 자국 기업들이 싼 값에 생산하니 한국 제품을 굳이 살 이유가 없다.”

-TSMC가 파운드리 분야에서 삼성전자를 월등히 앞서는 가장 큰 이유가 뭘까.

“삼성과 TSMC는 완전히 다른 회사다. 자기 브랜드 없이 사업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 우리나라 대기업 중 남의 브랜드 제품을 생산하며 돈 버는 그룹이 어디 있나. 한국 사람들은 독자 브랜드를 갖고 싶어 한다.

반면 TSMC는 서비스 회사다. 고객사에 최적의 서비스를 해주고, 생산 공정도 모두 투명하게 보여준다. 대만인들은 그런 서비스를 약 30년 간 해왔다. 중국인과 대만인들이 공통적으로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우리 것을 왜 보여줘야 하냐’는 인식이 강하다. 대만인들과는 체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DNA를 갖고 있다.”

2006년 3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진대제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와이브로와 DMB 시연장에서 제품 시연을 하고 있다. /조선일보DB

-시스템 반도체 영역에서 우리 기업들이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가 있는지.

“팹리스와 파운드리 같은 전(前)공정보다는 패키지, 테스트 같은 후(後)공정에서 경쟁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 팹리스 시장 규모가 1000억 달러,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가 1500억 달러인데, 패키징 시장 규모가 그에 못지 않은 1000억 달러나 된다. 굉장히 큰 시장임에도 우리 기업들은 거의 진출하지 않은 상태다. 정부가 나서서 지원해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다.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분야라고 본다.

반도체 공정이 미세화하고 어려워질 수록 투자 비용과 제조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후공정인 패키징 기술로 집적도를 높이고 전력 소모를 줄이는 등 보완적 수단의 중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향후 10년 안에 후공정이 전공정보다 더 중요해지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시스템화, 3차원화 기술의 발전과 함께 미세공정기술이 중요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후공정 분야에서 한국 기업의 성적표는 15등이 최고다. 정부가 바로 여기에 돈을 투자해야 한다. 우리 기업들이 반도체로 먹고 살 거리를 만들어주고 돈을 투자해줘야 한다.”

-최근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향후 5년 간 1조원을 투입해서 인공신경망처리장치(NPU) 기술력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현실성이 있는 얘기인지 궁금하다.

“내가 10년 전부터 주장해온 바다. 그 당시보다 지금 훨씬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다. 자율주행 자동차에 들어가는 시스템 대규모집적회로(LSI)를 설계할 때, 반도체만 설계하던 사람이 완성차 업체 전문가보다 더 잘 알 수 없다. 완성품을 만드는 쪽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제대로 알아야만 설계가 가능하다.

가령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를 만드는 것은 전력이 적게 들도록 하면서 빠른 성능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기존 메모리 반도체의 공정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그러나 자율주행차에 들어가는 반도체는 어마어마하게 복잡하다. 완성차를 만드는 사람이 반도체를 설계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가르쳐줘야 팹리스가 가능해진다.

현대차에서 자율주행차에 탑재되는 반도체를 설계하는 사람, 파운드리를 하는 사람 등이 협업을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도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기업끼리 자율적으로 협업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만큼, 정부가 나서서 판을 만들고 돈을 투자해 대학을 유치하고, 인력을 육성하고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국가가 (1조원이 아닌) 2조원을 댈 만한 가치가 충분한 영역이다.”

-반도체 학과를 증원하고 인공지능(AI)반도체 연합 전공을 개설하는 등의 방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향후 2~3년 안에 반도체 패권이 결정될 중요한 시기인 만큼, 학부생이나 대학원생 같은 ‘훈련병’을 키우기보다는 경험이 풍부한 해외 우수 인재들을 영입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주장도 많다.

“인재를 길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고급 인력이다. 고급 인력은 위에 말한 국가적 과제와 산업 간 협업을 통해서만 육성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인재는 반도체 설계와 시스템 전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반도체 학과를 갓 졸업한 사람은 최소 20년은 지나야 그런 인재가 될 수 있다.”

-해외에서 우수 인재를 영입해오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지 않나.

“우수 인재가 한국에 들어와서 얼마나 더 많은 걸 배우고 발전할 수 있겠나. 미국 실리콘밸리 같이 세계적인 인재들이 모이는 곳에서나 더 성장할 수 있다. 엔지니어 입장에서 한국에 들어올 만한 동기 부여가 떨어진다. 올 만한 사람이 없다. 또 과거에나 한국에 오면 높은 직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 지금은 워낙 쟁쟁한 사람들이 많아 그 안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따라서 해외에서 좋은 인재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아주 큰 공을 들여야 한다.”

-미중 반도체 전쟁이 심화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미국과 일본, 대만이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TSMC는 중국에 점령될 위험이 늘 있기 때문에 미국과 일본 등에 분산 진출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만과 상황이 다르긴 하나,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일본으로 이전해야 할 수도 있다. 남의 생존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 미·일·대만 동맹에 참여해야 한다.”

-한국의 벤처·중소기업들이 글로벌 경쟁자들보다 앞서나갈 수 있는 가장 큰 강점은 무엇이며, 반대로 고질적인 문제점과 약점은 무엇인가.

“소셜 미디어 같은 인터넷 기반 산업에서 특히 강점을 갖고 있다. 대부분 큰 자본이 들어가지 않는 사업이다. 다만 이런 산업은 해외 진출에 있어 한계를 지닌다. 여전히 영어라는 장벽이 있고, 문화적인 벽도 존재한다. 중국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언어와 문화적 장벽이 해외 진출의 장애물이지만, 그들은 내수 시장이 워낙 크기 때문에 그 안에서 똘똘 뭉쳐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잘하는 중소기업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대기업의 영향력 아래서 외주 협력 업체 형태로 성공하는 기업들이며, 다른 하나는 새롭게 떠오르는 분야에서 독자적으로 성장한 기업들이다. 그러나 후자 가운데서 시가총액 1조원이 넘는 회사는 많지 않다. 대기업이 하지 않는 일은 중소 벤처기업도 잘 안 하려고 한다. 대표적인 분야가 4차 산업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로봇 산업이다. 관련 산업을 영위하는 국내 중소기업이 몇 개나 되나.

또 후자 가운데 유니콘(기업가치가 1조원이 넘는 비상장 기업)으로 성장한 몇 안 되는 기업들도 대부분 글로벌 시장이 아닌 내수 시장을 겨냥한 유통 플랫폼이다. 의미 있게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새롭게 부상하는 산업에서 한국 기업이 제대로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정부가 그 부분에 관여해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시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이 조선비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매크로(거시) 환경의 악화로 비상장사들의 기업가치가 전반적으로 낮아진 상태다. 2000년 IT버블 붕괴 때와 현 상황이 비슷하다고 보는지 궁금하다.

“어느 정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후 2008년 금융 위기 때보다 더 많은 보조금이 시장에 풀렸고, 그 영향으로 최근 2년 간 기업들의 몸값이 전반적으로 급등했다. 그 와중에 공급망은 훼손되고 실물 경제는 망가지고 있으며,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의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 위기가 언제쯤 해소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같이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가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에서 투자한 회사들의 상황은 어떤지.

“포트폴리오사 가운데 미국에 수출하는 기업들이 배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선박 운임이 3배나 올랐고, 철강을 비롯한 원자재 값이 대부분 폭등했다. 주 52시간 근무 및 최저임금 제한 때문에 노동력 공급에도 지장이 있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기업들은 어떻게 버텨야 하나.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할 시기다. 현재의 위기가 내년 말까지는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경제가 본격적으로 하락하는 언저리에 있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 인건비 인상 압력이 높아질 것이고, 그러면 기업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기업들이 잇달아 도산하고 실업자도 늘어날 위험이 있다.”

-2018년부터 초대 한국블록체인협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중도 사퇴했는데, 이유가 궁금하다.

“협회장을 1년 반 맡는 동안, 암호화폐 산업의 리스크가 상당히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식은 실체가 있는 기업에 투자하는 수단이지만 암호화폐는 투기 세력이 아니라면 값이 오를 만한 원동력이 없지 않나. 블록체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현혹될 위험이 있다. 암호화폐는 주식과 달리 가격 유지를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정부가 나서서 규제하기도 쉽지 않은 영역이며, 불법 자금의 세탁으로 악용될 소지도 크다. 협회장을 맡으면서도 암호화폐에 투기를 해선 안 된다는 내용으로 여러 차례 강연을 했다.

4년 전 조사해보니, 그 때 벌써 우리나라에서만 사기의 위험이 있는 코인이 57개나 발행되고 있더라. 그 중 시가총액이 가장 작은 것도 1조원이 넘었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기업들을 위해 해줄 만한 조언이 있다면.

“기술이 급변하는 한편 경영 환경이 악화하고 있는 만큼, 각자 영위 중인 사업 모델을 재점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기다. 향후 생존 가능한 모델과 전략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을 자기 사업에 적용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 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