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은행연합회가 정치권에 가상자산 거래소 자금세탁 위험평가 방안을 공개한 가운데, 해당 방안이 사실상 자금세탁과 관련없는 요소까지 평가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은행들이 거래소의 경영실적과 가상자산의 신용점수까지 평가하면서 ‘과잉 규제’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은행권이 자의적으로 평가 지침을 만든 배경에는 정부의 ‘책임 떠넘기기’가 있다. 금융위는 은행이 평가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책임을 미루면서도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은행은 사고 위험성을 고려해 최대한 보수적으로 평가 지표를 구성했다.

8일 조선비즈가 윤두현 국민의힘 의원실로부터 입수한 ‘가상자산사업자 자금세탁 위험평가 방안’에 따르면 은행연합회는 가상자산사업자 필수요건으로 회사가 3년 연속 당기순손실을 기록하고 있는지 확인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당기순손실을 3년 이상 기록하면 점수를 낮게 받는 것이 아니라 평가 대상조차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은행 요건은 예시에 불과하지만, 시중은행엔 참고 지표로 활용된다.

전국은행연합회의 가상자산 거래소 평가 가이드라인./윤두현 국민의힘 의원실

은행연합회가 경영 실적과 관련된 지침을 마련한 이유는 가상자산 거래소가 재정적 한계로 횡령 등의 부정행위를 저지를 유인을 막기 위해서다. 같은 맥락에서 은행연합회는 ▲자기자본비율 ▲유동성비율 ▲자기자본이익률 ▲총자산이익률 ▲수지비율과 같은 거래소의 재정적 요인에도 점수를 매기고 있다.

하지만 경영 실적이 자금세탁 방지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부족한 데다 거래소 업계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기준이라는 반발이 나왔다. 임요송 코어닥스 대표(한국가상자산사업자연합회 회장)는 “현재 가상자산 거래소 업계엔 신생 기업이 많아 여전히 적자를 기록하는 곳이 많다”면서 “실적이 아직 개선되지 않았더라도 투자금을 유치하면서 재정적 한계를 보완하는데 이런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은행연합회는 신용점수가 낮은 종목일수록 점수를 받기 불리하도록 평가지표를 만들었다. 은행들은 ▲가상자산 신용도 ▲취급하는 가상자산 수 ▲고위험 코인 거래량 ▲거래소 코인별 거래량을 가상자산 정보 플랫폼 쟁글에서 책정한 종목별 신용점수를 활용해 평가한다. 예컨대 은행들은 거래소의 65점 미만인 가상자산 거래량을 계산해서 점수를 낮게 준다.

전국은행연합회의 가상자산 거래소 위험평가 가이드라인./윤두현 국민의힘 의원실

그러나 업계에서는 가상자산의 신용등급이 자금세탁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임요송 대표는 “비트코인은 쟁글에서 최상의 신용등급을 받았는데, 그렇다고 자금세탁 위험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느냐”면서 “오히려 발행자가 명확하지 않은 탈중앙화된 코인이어서 자금세탁에 활용되기 용이하다는 모순이 있다”고 말했다.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가상자산 신용점수는 투자자 보호와 관련 있는 사안으로 자금세탁과는 연관성이 적다”면서 “평가는 자금세탁방지국제기구(FATF)의 권고에 따라 본질적 목적에 맞게 이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투자자 보호와 같은 다른 사안은 정부의 별도 규제로도 관리 가능하다는 의미다.

업계에서 은행연합회의 위험평가 방안을 면밀히 주시하는 이유는 거래소의 존폐와 관련 있다. 거래소는 은행으로부터 위험평가를 받아 실명인증 계좌 제휴를 맺는다. 실명인증 계좌 제휴는 9월 24일까지 진행될 거래소 신고 필수 요건이다. 위험평가에서 탈락하면 신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평가 지표가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정부는 은행이 거래소를 평가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반복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8일 정무위원회 소속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은행의 위험평가가 공정한지 묻는 질문에 대해 “특정금융정보법에 따라 금융회사 등은 가상자산사업자와 거래 시 자금세탁 위험을 판단할 의무가 있으며, 이러한 차원에서 실명 확인 입출금 계정 개설 시 금융회사가 자금세탁 위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라는 서면 답변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