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후 경기도 성남의 한 건물 옥상. 중년 남성 두 명이 다소 거칠어 보이는 라이더 재킷 차림으로 나타났다. 각각 파랑과 빨강 헬멧을 손에 들고 가죽 장갑까지 착용한 이들은 화려한 레이싱용 소형 카트 위에 올라타더니 마치 레이싱이라도 하듯 핸들을 잡고 이런저런 포즈를 취했다.

‘지금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다고 생각해보라’는 사진작가 주문에 두 남성은 눈을 크게 뜨거나 입을 쩍 벌리면서 카메라를 응시했다. 무언가를 위한 결의를 다지는 듯 주먹을 부딪치기도, 어깨를 기대기도 했다.

진짜 레이싱 경기도, 그렇다고 잡지 화보 촬영도 아닌 이 자리는 현대카드가 넥슨과 파트너십 체결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는 현장이었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과 이정헌 넥슨코리아 대표가 직접 넥슨코리아 옥상에 마련된 트랙에 실제 카트를 올려놓고 넥슨을 대표하는 게임 ‘카트라이더’를 본뜬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과 이정헌 넥슨코리아 대표가 9일 넥슨 넥슨코리아 옥상에 마련된 트랙에서 실제 카트를 탄 채 파트너십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현대카드

이날 현대카드는 넥슨과 손잡고 국내 최초의 게임사 전용 상업자표시신용카드(PLCC)를 만들어 내년 상반기에 선보이기로 했다. 하지만 체결식 내내 하얀 종이에 두 회사 대표이사가 서명을 적고 문서를 나눠 갖는 딱딱함은 없었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금융이라는 업(業)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현대카드의 시도와, 상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게임을 만들어 온 넥슨이 함께 미래를 구상하는 자리라는 점을 감안해 형식을 뒤로하고 두 회사의 정수를 담을 만한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고 말했다.

“혹시 모션 캡처를 위한 연기는 유단자이거나 액션 전문 연기자 분들이 하시는 건가요?”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오늘 시연하신 분들은 개발팀 직원입니다. 전문 연기자가 참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넥슨 마비노기 영웅전 개발팀

이날 정태영 부회장은 넥슨 초대를 받아 넥슨코리아의 핵심 공간 ‘모션캡처 스튜디오’와 ‘비디오·사운드 스튜디오’를 찾았다. 낯선 게임 업계를 이해하기 위해 준비한 단계다. 이 두 곳은 넥슨이 개발하는 모든 게임의 영상과 음성을 개발하는 공간이다.

정 부회장은 모션캡처 스튜디오에서 ‘마비노기 영웅전’ 개발팀이 자이로센서 16개가 달린 검은색 촬영복을 입고 몬스터 간 결투 장면을 연출하는 장면을 감상했다.

모션캡처 기술을 활용한 정교한 액션으로 호평을 받은 마비노기 영웅전은 지난 2010년 ‘한국 게임 대상’을 수상했다. 비디오·사운드 스튜디오에서는 선풍기 팬을 돌려 비행기 프로펠러 소리를 만들고,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를 쭉 짜서 피가 흐르는 소리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정헌 대표가 정 부회장의 이런 모습에 “현대카드가 넥슨이 몸담은 비즈니스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하는 것 같아 감사하다”고 말하자 정 부회장은 곧 “넥슨과 함께하는 PLCC를 향한 여정이 마치 게임을 즐기듯 신나고 즐거울 것 같아 기대가 크다”는 덕담으로 화답했다.

두 대표는 이어 PC방으로 향했다. 정 부회장은 이 대표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간간이 컵라면까지 먹어가면서 넥슨이 현재 비공개 베타 테스트(CBT) 중인 ‘카트라이더 드리프트’를 함께 즐겼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과 이정헌 넥슨코리아 대표가 PC방에 나란히 앉아 비공개 베타 테스트 중인 ‘카트라이더 드리프트’를 즐기기고 있다. /현대카드

현대카드는 지금껏 약 40여 종에 달하는 PLCC를 내놨다. 그중에 정 부회장이 직접 해당 기업을 찾아가 기업 대표와 격의 없는 기념 촬영을 연출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융권에서는 그만큼 현대카드와 넥슨의 파트너십이 단순한 기업 PLCC를 하나 내놓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닐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날 현대카드에 따르면 두 대표의 파트너십 기념 촬영에 앞서 두 회사 데이터 전문 부서는 2시간에 걸쳐 ‘데이터 협업’을 놓고 긴 이야기를 나눴다. 넥슨에서는 머신러닝과 딥러닝 등 넥슨의 게임 비즈니스 전반에 적용하는 데이터 사이언스를 이끄는 조직 ‘인텔리전스랩스’가, 현대카드에서는 AI(인공지능) 기반 데이터 사이언스와 솔루션 개발을 총괄하는 ‘디지털 부문’이 참여했다.

이미 글로벌 게임업계에서 넥슨은 게임 내 유저 행동 데이터 분석 기술로 명성이 높다. 현재 넥슨은 직접 게임 데이터 기반 데이터 분석 플랫폼 ‘넥슨애널리틱스’를 개발해 운영 중이다. 강대현 넥슨 인텔리전스랩스 총괄은 이날 “게임 공간에서 수십 만명의 유저들이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들을 잘 분석하면 게임 개발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현대카드 역시 지난 5년간 쌓은 다양한 데이터 분석 솔루션을 기반 삼아 테크 기업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현재 데이터 플랫폼 구축을 포함한 디지털 분야에 전체 이익의 35%를 투자한다. 금융 소비자 결제 데이터를 분석해서 맞춤형 마케팅까지 처리하는 인공지능 플랫폼 ‘트루 노스(True North)’가 대표적이다.

두 회사는 게임과 금융 데이터 분석에 쓰이는 접근 방식을 기반으로 협업하면 유저 성향 추론이나 소비 예측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넥슨은 게임 내에서 유저 행동을 구분해 정형화하고, 여러 상황을 표준화해 관리한다. 이런 프로파일(Profile)을 적절히 활용하면 유저 개인에게 맞는 마케팅은 물론 돌발 상황에도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정 부회장은 “이전에 넥슨 인텔리전스랩스 조직이 500명 규모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앞으로 700명까지 인원을 늘린다니 대단하다”며 “넥슨의 데이터를 처리하고 사용하는 방법이 현대카드와 유사해 협업하면 잘 통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