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 활용도가 줄면서 발행량도 쪼그라든 은행 달력이 정작 중고거래 시장에서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걸면 돈이 들어온다”는 속설 때문이다. 은행 달력을 찾는 수요도 꾸준하다. 2022년을 앞두고 탁상 및 벽걸이 달력을 제작한 시중 은행들은 판촉용으로 제작한 자사 달력이 중고 상품 시장에서 ‘굿즈(수집품 속성을 갖는 기획상품)’처럼 거래되는 현실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17일 국내 최대 중고거래 플랫폼 ‘중고나라’를 기준으로 시중은행들이 본격적으로 달력을 배포하기 시작한 11월 마지막 주부터 이날까지 신한·KB국민·하나·우리·NH농협 등 국내 5대 시중은행이 만든 은행 달력을 판다는 거래 글이 하루 평균 50여건씩 올라왔다.

시중은행 가운데 가장 거래가 많은 은행 달력은 신한은행 달력이다. 신한은행은 12월 이후 게시글 수가 114건에 달했다. 우리은행 달력이 2위를 차지했고, KB국민은행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 시중은행은 최근 달력을 찾는 금융 소비자들의 문의가 물 밀 듯이 몰려들자 입구에 ‘신년 달력 없습니다’와 같은 문구를 붙여 놓기도 했다.

은행에서 ‘공짜’로 주는 이들 달력은 인터넷 중고거래 시장에서 싸게는 2000~3000원, 비싸게는 탁상용 달력과 벽걸이 달력 세트로 2만원 대 중반에 이르는 값에 팔리고 있다.

은행 달력은 예전부터 ‘집이나 매장에 걸어두면 돈이 들어온다’는 속설 때문에 소상공인을 중심으로 오프라인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었다. 휴대폰으로도 달력을 확인할 수 있지만 고령층 등 여전히 종이 달력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상당하다. 여기에 올해는 은행들이 종이 달력 발행을 예년보다 더 줄이면서 마치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한정판 상품이나 희귀 아이템처럼 다뤄지는 분위기까지 더해졌다.

한 인터넷 중고거래 앱에 올라온 은행 달력 관련 매물.

연말이면 은행 창구에 쌓아뒀던 달력을 흔히 볼 수 있었던 2000년대 초, 주요 시중은행들은 탁상 달력과 벽걸이 달력을 모두 합쳐 최소 300만부에서 최대 500만부까지 찍었다. 이 부수는 올해 기준 50만부에서 150만부 수준으로 대폭 줄었다. 비용도 비용인데다, 스마트폰 달력 활용이 일반화되면서 종이 달력 활용도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금융권에서 강조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차원에서 봐도 종이 달력은 환경 중심 경영 기조에 딱히 부합하지 않는다.

보통 11월말이면 은행 지점에서는 달력 배포를 시작하는데, 요즘은 매년 배포량이 줄어들자 직원이나 어지간한 우량 금융 소비자가 아니면 달력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운 편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어느 은행 모 지점에서 계좌를 열면 달력을 배부한다’거나 ‘회원 등급이 높으면 별도 우대 서비스 데스크에 가서 문의를 해보라’는 식의 정보 공유도 이뤄지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전에도 만들었던 달력 대부분은 영업점에서 고객 관리 차원에서 사용하곤 했다”며 “최근 영업점을 줄이는 추세다 보니, 달력은 영업부서가 달력을 주로 사용하는 세대들이 많다고 판단한 지점 위주로 배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도심 지역에서 종이 달력 품귀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자 가게를 운영하는 소상공인 등 일부 금융 소비자들은 온라인에서 돈을 줘가면서라도 은행 달력을 구하기에 혈안이 됐다. 동시에 은행 직원들이나 인쇄소 관계자들로 추정되는 판매자가 대량으로 온라인에서 판매를 하는 경우도 생겼다.

현재 인터넷 포털사이트 중고장터나 애플리케이션(앱)에서 거래 중인 달력 시세를 보면 달력 배포가 막 시작됐던 11월 말에 비해, 배포를 마친 12월 둘째 주에 접어들면서 은행 별로 달력 ‘몸값’에 차이가 생겼다.

호가가 가장 비싼 곳은 의외로 수협으로, 벽걸이 달력 하나에 1만원을 오르내린다. 어린왕자 연작으로 유명한 강석태 조선대 교수의 그림에 수협의 이미지를 담아 달력에 적절히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협 특성상 가뜩이나 시중은행에 비해 발행량이 많지 않은데, 여느 때보다 달력에 삽입한 그림이 예뻐 자녀방에 걸어두려는 신도시 학부모들 사이에서 몸값을 높이고 있다. IBK기업은행 벽걸이 달력은 석달치 날짜가 한 장에 담겨 있어 달력을 자주 넘기기 불편해 하는 어르신들이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달력을 원하는 기존 금융 소비자들에게 달력을 충분히 주지 못하는 가운데, 정작 무료로 나눠준 달력은 유료로 인터넷 중고거래 시장에서 팔리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금융권에서 달력 배포 업무를 맡은 관계자들의 고충은 더 커진 상황이다.

한 상호신용금고 관계자는 “수십 부도 아니고, 온라인에서 수백부 이상 이렇게 대량으로 판매될 정도면 지점 몇 곳으로 나갔어야 할 물량이 인쇄소나 배포 단계에서 빠져 나갔다는 의심을 해 볼 정도”라면서도 “어차피 홍보를 목적으로 제작한 상품이기 때문에 일단 회수할 생각은 없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