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이 점포를 줄이는 대신 비대면·디지털화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올 한해만 260여개의 오프라인 점포가 사라질 전망이다. 디지털 기술에 익숙하지 않아 소외된 노인들은 폐점 반대 운동까지 벌이고 나섰다.

15일 은행권에 따르면, 서울 노원구 신한은행 월계동 지점 바깥에는 ‘창구 남아라’ ‘폐점 안 돼’와 같은 문구가 적힌 빨간 스티커들이 나붙었다. 전날 주민 50여명이 모여 폐점 반대 집단행동을 벌인 데 따른 것이다. 이날 집단행동에 나선 주민들은 대부분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이었다.

점포를 통폐합 해 '디지털 라운지로 전환한다'는 안내문이 붙은 서울 노원구 신한은행 월계동지점의 모습. 월계동 주민들이 '창구 남아라' 등 문구가 적힌 스티커를 은행 앞에 붙이고 있다. /연합뉴스

앞서 신한은행은 내년 2월 이곳 월계동 지점의 통폐합을 공지하고, 무인형 점포 전환을 통보했다. 1987년 개점한 이곳은 월계동 일대 5000여 세대에 이르는 아파트 주민들이 수십년간 이용해 온 곳이다. 이 자리에는 ‘디지털 라운지’가 들어선다. 사람처럼 구현된 AI 은행원이 등장해 업무를 안내하고, 화상 화면을 통해 업무를 처리해줄 직원을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식이다.

월계동 지점에서 대면 업무를 볼 수 없게 된 주민들은 앞으로 3㎞가량 떨어진 성북구 신한은행 장위동 지점을 이용해야 한다. 지하철역으로 두 정거장 정도가 떨어진 데다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30분가량 소요되는 거리다. 그나마 근거리에 있었던 KB국민은행도 오는 27일 폐쇄될 예정이다.

금융위원회가 제공하고 있는 '금융맵' 상 서울 노원구 월계동 일대 은행 지점의 모습. KB국민은행의 12월 27일 지점 폐쇄 예고가 안내돼 있는 가운데, 인근에 있는 신한은행 마저 내년 2월 무인 점포로 전환될 예정이다. /박소정 기자

실제로 은행의 지점·출장소 등 대면 업무가 가능한 점포 수는 가파르게 감소하고 있다.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영업점포 수는 2015년 말 4311곳이었는데, 지난 11월 기준 3343곳으로 대폭 줄었다. 약 6년 새 1000곳이 사라진 셈이다. 앞으로도 지점 폐쇄 속도는 더욱더 가팔라질 전망이다. 배진교 정의당 의원실에 따르면 올 한해에만 261곳의 지점이 문을 닫고, 내년 1월에도 최소 72개 지점이 영업을 중단할 것으로 보인다.

대신 은행들은 대면 점포를 대체할 비대면·디지털화에 역량을 쏟고 있다. 우리은행과 국민은행은 최근 화상 상담 서비스를 도입했다. 디지털데스크에 앉아 화면의 상담 연결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화상 상담직원이 원하는 업무를 처리해주는 식이다. 국민·신한·하나은행 등은 월계동 지점과 같은 무인 디지털 점포를 지속해서 확대하는 추세다.

아직 걸음마 단계이긴 하지만 가상 은행원도 속속 현장에 투입되고 있다. 신한은행은 내년 1월까지 200대, 내년 말까지 400~500대의 AI 행원 배치를 목표하고 있다. 우리은행은 최근 AI 행원을 대상으로 사내 교육에 돌입했고, 추후 영업점에도 도입할 계획이다. 농협은행은 아예 AI 행원에 사원 번호를 부여하는 등 정식 사원으로 인사 발령을 내 화제를 모았다.

그래픽=이은현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간단한 입출금 업무마저 대면 창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고령층은 점점 사각지대로 내몰리고 있다. 이번 신한은행 월계동 지점과 같이 집단행동에 나서는 사례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충남 태안군 태안읍 농협 출장소, 서울 성동구 응봉동 하나은행 출장소, 서울 도봉구 도봉2동 신한은행 지점 등이 과거 주민 반발에 부딪혀 당초 폐쇄 계획을 수년간 유예한 바 있다.

금융당국은 무분별한 은행 점포 폐쇄를 막기 위해 지난 3월부터 강화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지만, 무색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지점 폐쇄 전에 은행들은 사전영향평가를 해 고객의 접근성 문제 등을 따져야 하는데, 사실상 동일 행정구역에 1곳이라도 은행점포가 위치해 있으면 결과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현실이다.

당초 폐쇄 예고를 1개월 전에 하면 됐던 규정이 3개월 전으로 변경됐지만, 이 역시 부담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은행권 관계자의 설명이다. 전국은행산업노동조합협의회는 은행 점포폐쇄 중단을 촉구하며 금융당국에 가이드라인 강화를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