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금리가 연일 고공행진하고 있는 가운데 이자율 0%의 전환사채(CB)를 통해 상장사에 투자하는 기관들이 여전히 많다. CB는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회사채를 말한다. 만기가 도래하면 (혹은 도래하기 전 풋옵션을 통해) 원금과 일정 수준의 이자를 돌려받을 수도 있고, 만약 회사 주가가 많이 오른다면 전환권을 행사해 주식으로 바꾼 후 팔아서 차익을 얻을 수도 있다.

일러스트=이은현

기관 투자자들은 매도청구권(콜옵션) 한도를 대폭 줄이거나 전환가액 조정(리픽싱) 주기를 늘리는 등 유리한 조건을 넣어 무이자 CB에 투자하고 있다. 증시가 연초 고점 대비 대폭 하락해 전환가액이 워낙 낮은 만큼, 향후 주가 상승시 큰 차익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무이자로 300억 조달한 케이옥션, 와이팜

25일 금융 투자 업계에 따르면, 코스닥 상장사 와이팜(332570)은 지난 19일 280억원 규모의 무기명식 이권부 무보증 사모 CB를 발행하기로 했다. 표면이자율과 만기이자율 모두 0%이며, 만기일은 2027년 10월 21일이다. 신한투자증권, 미래에셋증권, KB증권과 에이원자산운용 등 7개 운용사가 참여하기로 했다.

티에스아이(277880) 역시 같은 날 40억원 규모의 무이자 CB를 발행한다고 공시했다. 안다자산운용이 4개 펀드를 통해 투자한다. 지난 14일에는 미코바이오메드(214610)가 0% CB를 통해 90억원을 조달한다고 밝혔고, 6일에는 디엑스앤브이엑스가 170억원을, 우양(103840)이 70억원을, 4일에는 압타머사이언스(291650)가 165억원을 각각 무이자 CB로 투자 받기로 결정했다. 지난달에는 대형 벤처캐피털(VC) LB인베스트먼트가 무이자 CB로 케이옥션(102370)에 295억원을 베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무이자 CB는 발행사, 즉 투자를 받는 회사에 유리한 자금 조달 수단이다. 금리 상승기에도 이자 한푼 내지 않고 수십~수백억원을 융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관 입장에서는 기대되는 이자 수익이 없는 만큼 향후 주식으로 전환해 엑시트(투자금 회수)하려는 목적이 있을 때만 무이자 CB로 투자한다. 즉, 현재 기업가치가 현저히 저평가됐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이용 가능한 투자 방식이다.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기관 입장에서는 운용하는 펀드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3~4%의 이자 수익이 그리 큰 의미가 없다”며 “무이자로 들어가되 콜옵션이나 리픽싱에 있어 좀 더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 VC 임원도 “지금처럼 상장사들의 주가가 많이 하락한 시기에는 전환가액을 낮게 설정해 향후 시세차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며 “애매한 비상장사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향후 업사이드(주가 반등)를 노리고 상장사 메자닌에 투자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 콜옵션 없애거나 비율 낮추고…리픽싱 주기는 3개월→7개월

실제로 최근 무이자 CB를 발행한 회사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투자자에 유리한 조항이 많이 포함돼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콜옵션 비율을 대폭 낮춘 사례들이 있다. 콜옵션은 회사가 만기 도래 전 투자자로부터 CB를 다시 사들일 수 있는 권리로, CB 권면총액의 30%까지 부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대주주는 콜옵션을 행사하면 낮은 가격에 주식을 대거 사들여 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다. 비율이 높을 수록 대주주에는 유리하게, 투자자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일례로 증시 활황기였던 지난 2021년 카카오게임즈는 50% 콜옵션의 조건을 내걸고 CB를 발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LB인베스트먼트의 케이옥션 투자 건에는 콜옵션 조항이 아예 포함되지 않았다. 우양과 디엑스앤브이엑스의 콜옵션 한도도 각각 10%, 19.57%로 낮은 편이다.

전환가액 리픽싱 주기를 연장하는 사례도 눈에 띈다. 지난해 12월 금융위원회는 CB의 전환가액 상향 조정을 의무화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CB 발행 후 시가가 상승하면, 전환가액을 최초 전환가액의 70~100% 이내에서 상향 조정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이 때문에 투자자 입장에서는 시세가 오르면 CB를 주식으로 전환해 얻을 수 있는 차익이 줄게 됐다.

일부 투자자들은 리픽싱 주기를 늘려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고 있다. 향후 시세가 상승한다는 가정하에, 리픽싱 주기가 도래하기 전 주식을 전환해 판다면 투자자가 취할 수 있는 시세 차익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CB의 전환가액 리픽싱 주기는 3개월로 설정되나, 와이팜과 미코바이오메드는 주기를 7개월로 늘렸다.

그 외에도 투자자들은 조기상환청구권(풋옵션) 행사 시기를 앞당기는 방법으로 안전 장치를 강화하기도 한다. 대체로 풋옵션 행사가 1년 6개월 이후부터 가능하다면 투자자에 유리하다고 여겨진다. 미코바이오메드가 대표적인 예다. 반면 풋옵션 행사가 2년 이후부터 가능하다면 발행사(투자 받는 회사)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있다.

다만, 무이자 CB의 발행은 앞으로 점점 자취를 감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로 회사채 시장의 자금 경색이 심해진 만큼, CB의 발행 수요가 대폭 늘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 VC 관계자는 “CB를 발행하면 지분 가치가 희석된다는 이유로 회사채를 통해 ‘대출’을 받는 회사들이 많았는데, 회사채를 통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짐에 따라 CB의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라며 “만기이자율 5~6%대 CB의 발행이 보편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