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계속된 증시 불황에도 기업공개(IPO) 수요가 몰리며, 한국거래소의 상장 예비심사 일정이 전체적으로 지연되고 있다. 상장 심사 결과를 기다리며 대기 중인 회사만 60개가 넘는다.

증권 업계 관계자들은 이 같은 ‘상장 예심 병목’ 현상 이면에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우선 지난해 증시 호황 속에서 프리(pre) IPO 투자를 받은 회사가 워낙 많아 상장 수요는 넘치는데 심사 인력은 한정돼있다. 또 매크로(거시) 환경의 악화로 실적이 부진한 기업이 늘어, 거래소 입장에서는 재무 상황을 더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성이 커졌다.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전경. /뉴스1

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현재 유가증권·코스닥시장에 상장 예심을 청구한 후 대기 중인 회사는 총 62개에 달한다.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과 리츠를 포함한 수치다.

일부 기업은 예심을 청구한 지 5개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결과를 받지 못하고 있다. IPO ’대어(大魚)’로 일찌감치 주목 받아온 컬리가 대표적인 예다. 컬리는 지난 3월 28일 유가증권시장에 예심 청구서를 넣었지만 이달 중순에야 상장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다. 상장 예심에 통상 2개월이 소요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많이 지연된 셈이다.

스마트폰으로 밝기와 색을 조절할 수 있는 조명을 만드는 메를로랩, 안과 유전 질환 진단 기업 아벨리노, 산업용 로봇을 만드는 뉴로메카 역시 지난 3월 코스닥시장에 상장 예심을 청구한 회사들이다. 4월에도 골프존카운티·블루포인트파트너스·쓰리빌리언 등 10개 회사가 유가증권시장이나 코스닥시장에 상장 예심 청구서를 넣고 대기 중이다.

상장 예심의 지연 현상은 코스닥시장이 특히 심하다. 현재 코스닥시장 기술기업상장부에서 동시에 검토 중인 회사는 4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기술 특례상장을 추진 중인 회사가 20여개다.

증권 업계의 한 관계자는 “거래소 상장심사 담당 팀장 한 명이 아무리 많아야 7~8개 회사를 동시에 검토하고 팀원은 한 명당 2개 기업을 심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지금은 팀장 한 명당 15여개 기업을, 팀원 한 명이 4개 기업을 동시에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올해 증시가 침체됐음에도 상장 수요가 오히려 늘고 있다고 말한다. 한 벤처캐피털(VC) 관계자는 “작년에 시장이 워낙 좋아 벤처 투자가 초호황을 이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프리IPO 단계의 투자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통상 프리IPO 투자는 1년 안에 상장해 50~100%의 수익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올해 중 엑시트(투자금 회수)를 해야하는 기관 투자자들이 많다는 얘기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VC들이 후기 기업에 투자한 금액은 총 2조3390억원에 달했다. 전체 투자금(7조6802억원)의 30%를 차지한다. 전년도 후기 기업 투자금(1조2572억원)과 비교하면 두 배에 가까운 금액이다.

자금 융통이 절실한 기업들이 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VC 관계자는 “매크로 환경의 악화 때문에 실제로 돈이 부족한 회사가 굉장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작년 같은 상황이었다면 국내외 기관에서 추가 투자를 받았겠지만, 올해는 투자사들은 물론 출자자(LP)들도 몸을 사리는 만큼 기업 입장에서 IPO가 거의 유일한 자금줄일 것”이라고 말했다.

거래소 입장에서는 실적이 악화한 회사들의 상장을 승인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특히 기업의 실적 악화가 매크로 등 외부 요인 때문에 나타난 일시적 현상인지 혹은 회사 자체의 문제 때문인지 꼼꼼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심사가 다소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전했다.

기업의 내부 통제와 관련된 리스크도 거래소에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올 초 오스템임플란트 직원의 횡령 등 상장사들의 사건 사고가 터지며 경영 투명성에 대한 잣대가 높아진 것이 사실”이라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