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플레이 시장에서 견고한 벽을 쌓아왔던 한국 기업들이 중국의 공세로 흔들리고 있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중국이 한국을 밀어내고 시장을 완전히 장악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최근이다. 이미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을 정복한 중국 기업들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시장으로 전선을 확대하는 중이다. 우리 기업들은 기술 초격차를 통해 중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전략이나, 변화의 바람은 예측하기 어렵다. 격변하고 있는 디스플레이 시장을 진단하고, 우리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두 편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주]

中 올해 TV용 LCD 점유율 60% 넘을 듯
중소형 OLED도 10% 점유율 돌파하며 약진
대형 OLED는 여전히 99% 국내 기업 차지
"기술 격차 여전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목소리도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 TCL이 지난해 1월 열린 세계 최대 IT·전자 전시회 CES 2020에서 8K 해상도의 TV 신제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2024년까지 중소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시장 점유율을 40%로 늘리겠다."

창정 BOE 부총재는 지난해 9월 2020년 3분기 실적 컨퍼런스콜(기업설명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2015년까지 중소형 OLED 점유율 1% 미만에 불과하던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가 액정표시장치(LCD)에 이어 OLED 시장까지 꿀꺽 삼켜 버릴 것이라는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언제까지나 견고할 것이라고 여겼던 한국 디스플레이 기업의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8일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중국은 올해 전 세계 LCD TV 패널 시장에서 점유율 60.7%를 기록할 전망이다. 대만(20.9%)과 한국(11.2%), 일본(7.2%) 점유율을 합쳐도 중국의 시장 장악력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래픽=박길우

글로벌 LCD 시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2016년까지 한국의 독무대였다. 10년간 글로벌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는 1~2위를 나란히 유지하면서 전 세계 LCD 패널의 절반을 차지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디스플레이 시장 장악을 위해 중국 기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의 저가 공세가 시작됐다. 선봉에는 BOE, CSOT(차이나스타), HKC 같은 기업이 섰다. 이들은 2015년부터 빠르게 생산량을 늘려갔고, 결국 2017년 한국을 밀어내고 글로벌 점유율 1위에 올라섰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제로섬 게임’을 버티지 못했다.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LCD 생산량을 줄여나간 것이다. 이어 점유율 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는 LCD 사업 철수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 LCD 생산라인에서 한 작업자가 유리기판을 검사하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달 중국 쑤저우에 남아있던 LCD 생산 라인을 CSOT에 매각했다. 삼성디스플레이의 LCD 생산량은 지난 2019년 월 17만장에서 월 8만장 수준으로 줄었다. LG디스플레이 역시 중국 광저우 LCD 공장을 지난해 OLED 생산라인으로 전환했다. 경기 파주시 LCD 생산 시설도 이르면 내년 모두 철수한다.

어느 정도 시장 장악이 됐다고 판단한 중국 기업들은 ‘제로섬 게임’을 끝내고, ‘수익 확보’ 쪽으로 전략을 틀었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이후 디스플레이 수요가 폭증하면서 LCD 패널 가격은 상승 흐름을 탔다. 시장조사업체 디스플레이서플라이체인컨설턴트(DSCC)에 따르면 43인치 LCD 패널 가격은 지난해 3월 78달러(약 9만원)에서 올해 3월 128달러(약 14만원)로 2배 가까이 뛰었다. 55인치 LCD 패널 역시 같은 기간 115달러(약 13만원)에서 203달러(약 23만원)로 큰 폭으로 올랐다.

중국 BOE는 지난해 말 처음으로 애플 아이폰의 디스플레이(교체용) 공급사로 선정됐다. 사진은 애플 아이폰12 모습.

중국 기업들이 최근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건 OLED 시장이다. 제1 타깃은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스마트폰용 중소형 OLED다. 업계는 LCD 전례를 생각했을 때, 중국이 5년 내 한국을 앞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16년 중소형 OLED 시장에 진출, 3년 만에 10% 점유율을 돌파했고, 지난해에는 13.9%까지 영향력을 높였다. 반면 지난 2018년까지 90% 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갖고 있던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는 중국 업체의 추격이 시작되면서 2019년 88.6%, 지난해 86.1%로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다.

아직 기술력 부분에서 중국 업체를 앞서고 있다고 해도, 중국이 무서운 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생산량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품질도 개선된다는 양질전화(量質轉化) 법칙이 OLED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저가 공세까지 이뤄진다면 시장 장악은 시간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박길우

이미 중국 기업들의 진격은 시작됐다. BOE가 연거푸 탈락했던 애플 아이폰의 디스플레이 공급사로 선정된 것이다. 교체용(리퍼비시) 디스플레이지만, 품질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나아가 신품 디스플레이까지 BOE가 공급사로 채택되면 중소형 OLED 점유율이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TV용 대형 OLED 시장의 경우 아직 LG디스플레이의 아성을 넘을 중국 기업은 보이지 않는다. TV용 패널은 공정의 어려움으로 삼성디스플레이도 양산에 성공하지 못한 상태다. 이 시장의 99%는 LG디스플레이가 쥐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업체들이 대형 OLED를 양산하려면 최소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LG전자가 CES 2020에서 세계 최초로 선보인 롤러블 TV ‘LG 시그니처 올레드 R’ 모습.

다만 이 또한 중국의 막대한 투자가 선행된다면 기술 격차는 의외로 빠르게 좁혀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충훈 유비산업리서치 대표는 "대형 OLED에서는 여전히 국내 업체와의 기술 격차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기술 격차라는 게 한 번 좁혀지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추월당할 수 있다"며 "BOE를 포함한 중국 업체들이 대형 OLED 투자 검토를 시작한 만큼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했다.